《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원년(642)에 김춘추가 나오는 기사는 원문으로 열네 글자뿐이다. ‘신라가 백제를 치고자 꾀하여 김춘추를 보내 군사를 요청하였으나, 〔왕은〕 듣지 않았다.’ 같은 책의 신라본기와 김유신열전은 이 일을 훨씬 길게 적었다. 그런데 두 기록을 나란히 놓으면 고구려 왕이 김춘추에게 무엇을 요구했는지부터 어긋난다.
신라본기 선덕왕 11년 겨울 기사에서 고구려 왕은 죽령 서북의 땅을 돌려주면 군사를 내주겠다고 말한다. 김유신열전에서 같은 땅 이야기는 군사를 내줄 조건이 아니라, 돌려주지 않으면 돌아갈 수 없다는 위협으로 나온다. 642년 겨울 청병이 왜 실패했느냐고 물으면, 같은 책 안에서 답이 두 가지로 갈린다.
대야성이 무너진 해의 겨울
신라본기의 642년은 패전으로 채워져 있다. 7월에 백제 의자왕이 나라 서쪽의 40여 성을 빼앗았고, 8월에는 백제 장군 윤충이 대야성을 함락해 도독 품석 등이 죽었다. 겨울 기사는 왕이 대야성 싸움을 되갚으려고 이찬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 군사를 청했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바로 이어지는 대목은 같은 출발을 김춘추 쪽에서 다시 적는다. 대야성에서 죽은 품석의 아내가 춘추의 딸이었다. 소식을 들은 춘추는 기둥에 기대어 하루 종일 눈도 깜박이지 않았고, 앞으로 사람이 지나가도 알아채지 못했다고 기록은 전한다. 그러고는 왕에게 나아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서 군사를 청해 백제에 원수를 갚겠다고 했고, 왕이 허락했다. 기사 안에서 고구려행은 왕의 뜻이면서 춘추가 자청한 일이기도 하다.
이 기사의 역주 주석은 대야성 패전으로 정치적 위기를 맞은 김춘추가 이를 만회하려고 고구려행을 결심했다는 연구자의 견해도 소개한다. 사서가 적은 동기는 딸을 잃은 원한이고, 정치적 계산은 연구자들이 그 위에 더한 해석이다. 어느 쪽이 더 컸는지는 이 기사만 보고는 알 수 없다.
김유신열전은 출발 전 장면을 하나 더 싣는다. 열전은 그 딸의 이름을 고타소랑이라고 적었다. 떠나기 전 춘추가 자신이 저곳에서 해를 입으면 무심하겠느냐고 묻자, 유신은 공이 돌아오지 못하면 자신의 말발굽이 고구려와 백제 두 왕의 조정을 반드시 짓밟을 것이라고 답했다. 두 사람은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마시며 맹세했고, 춘추는 일정을 헤아려 보니 60일이면 돌아올 것이라고 했다. 이 60일은 뒤에서 다시 나온다.
신라본기의 회담, 땅을 돌려주면 군사를 내준다
신라본기에서 고구려 왕 고장, 곧 보장왕은 평소 춘추의 명성을 들은 터라 군사의 호위를 엄중히 한 뒤에 그를 만났다. 춘추는 백제가 ‘긴 뱀과 큰 돼지’처럼 신라 땅을 침범하므로, 신라 왕이 대국의 병마를 얻어 그 치욕을 씻고자 한다고 말한다. 왕의 답은 이렇다. “죽령은 본래 우리의 땅이니, 너희가 만약 죽령 서북의 땅을 돌려준다면 군사를 내줄 수 있다.”
원문은 ‘汝若還竹嶺西北之地, 兵可出焉’이다. 땅을 돌려받는 것이 군사를 내주는 조건이다. 춘추는 임금의 명을 받들어 군사를 구하러 왔는데, 대왕은 환란을 구하고 이웃과 친선할 뜻은 없이 사신을 위협해 땅만 요구한다고 맞섰다. 그리고 죽을지언정 다른 것은 알지 못한다고 맺었다. 왕은 그 말이 불손하다며 노해 그를 별관에 가두었다. 기록 순서로 보면 회담은 땅 조건에서 막혔고, 그 조건을 물리친 말 때문에 춘추가 갇혔다.
하필 죽령이었던 까닭을 같은 기사의 주석은 단양 신라 적성비로 설명한다. 신라가 551년 이전에 죽령을 넘어 남한강 상류까지 나아갔다는 것이다. 고구려 사람의 입에서 이 고개가 나온 것도 이 책에서 처음이 아니다. 온달 열전에서 온달은 출정에 앞서 “계립현·죽령의 서쪽 지역을 되찾아오지 못한다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보장왕이 신라 사신 앞에 꺼낸 땅은 같은 책에서 고구려 장수가 이미 한 번 맹세에 걸었던 땅이다.
사신을 가둔 뒤의 일은 짧다. 춘추가 몰래 사람을 보내 본국에 알리자, 왕은 대장군 김유신에게 결사대 1만 명을 거느리고 나아가게 했다. 유신이 한강을 넘어 고구려 남쪽 경계에 들어서자, 고구려 왕이 이를 듣고 춘추를 놓아 보냈다. 신라본기만 읽으면 김춘추를 데려온 것은 군사의 압박이다.

김유신열전의 회담, 돌려주지 않으면 돌아갈 수 없다
열전의 고구려행은 길에서부터 장면이 많다. 춘추는 사간 훈신과 함께 가다가 대매현에서 그 고을 사람 두사지에게 푸른 베 3백 보를 받았다. 고구려 경내에 들어서자 왕은 태대대로 개금을 보내 객사를 정해 주고, 잔치를 열어 매우 융숭하게 대접했다. 역주 주석은 이 개금을 연개소문으로 본다.
고구려본기는 바로 그해 겨울 10월에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시해했다고 적고, 보장왕 즉위년 기사는 그가 장, 곧 보장왕을 세웠다고 적는다. 신라본기는 김춘추가 만난 왕을 고장이라 적고 고구려본기는 이 일을 보장왕 원년에 두었다. 기록을 그대로 따르면 그해 겨울 춘추가 마주한 사람은 막 세워진 왕과 그 왕을 세운 사람이다.
융숭한 대접 다음 기사에서 분위기가 바뀐다. 열전에 따르면 누군가 왕에게, 신라 사신은 보통 사람이 아니며 고구려의 형세를 살피러 온 것 같으니 후환이 없게 하라고 고했다. 왕은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던져 춘추가 난처해하는 것을 빌미로 욕보이려 했다. “마목현과 죽령은 본래 우리나라의 땅이니, 만일 우리에게 돌려주지 않으면,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이 말에는 군사를 내준다는 대목이 없다. 땅은 사신을 돌려보내지 않을 구실로만 쓰인다.
춘추의 대답도 다르다. 신라본기의 춘추는 왕을 꾸짖으며 죽을지언정 다른 것은 모른다고 했지만, 열전의 춘추는 “국가의 토지는 신하가 마음대로 할 수 없기 때문에” 명을 따를 수 없다고 답한다. 왕은 노해 그를 가두고 죽이려 했으나 실행하지는 않았다. 두 기록 모두 땅을 거절한 사신이 갇히는 데서 만나지만, 열전은 이 회담을 처음부터 청병 협상보다는 사신을 시험하는 자리로 그린다.
고구려가 왜 응하지 않았는지를 두고 열전의 주석은 연구자의 해석을 하나 덧붙인다. 유혈 정변으로 집권한 연개소문이 신라·당과의 긴장을 이어 가는 편이 자기 권력을 안정시키는 데 유리하다고 보고 김춘추의 요청을 거절했다는 견해다. 다만 열전에서 개금이 직접 나오는 대목은 사신을 맞아 대접한 장면 하나다. 회담 자리에서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객관에 머무는 사신과 땅을 둘러싼 줄다리기는 350여 년 뒤 서희와 소손녕의 담판에서도 다시 볼 수 있다. 그 회담에서도 쟁점 가운데 하나는 고구려의 옛 땅이 누구의 것이냐였다.

푸른 베 3백 보가 산 이야기
길에서 받은 푸른 베는 갇힌 뒤에 쓰인다. 열전에 따르면 춘추는 이 베 3백 보를 왕이 총애하는 신하 선도해에게 몰래 주었다. 선도해는 음식을 차려 와 함께 술을 마셨고, 거나하게 취하자 농담하듯 물었다. 거북이와 토끼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느냐고.
동해 용왕의 딸이 심장병을 앓았는데, 토끼 간으로 약을 지으면 낫는다고 했다. 거북이 한 마리가 육지에 올라 바다 가운데 섬이 살기 좋다고 토끼를 꾀어 등에 업고 왔다. 2~3리쯤 헤엄쳐 가다 사정을 털어놓자, 토끼는 간을 꺼내 씻어 바위 밑에 두고 왔으니 돌아가 가져오자고 했다. 해안에 닿자마자 풀숲으로 달아난 토끼는 간 없이 사는 자가 어디 있느냐고 거북이를 비웃었다.
춘추는 그 뜻을 알아듣고 왕에게 글을 보냈다. 두 고개는 본래 대국의 땅이니 귀국하면 자기 왕에게 돌려주라고 청하겠으며, 믿지 못하겠다면 밝은 해를 두고 맹세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왕은 기뻐했다. 신라본기에는 선도해도, 이 글도 나오지 않는다.
이 이야기를 감옥 안에서 오간 말 그대로 받아 적은 기록으로 읽기는 어렵다. 주석은 비슷한 줄거리가 불경에 원숭이와 교룡·자라의 이야기로 전하고, 이것이 고구려에서 거북이와 토끼로 바뀌었으며, 훗날 토끼전과 판소리 수궁가로 이어졌다는 연구를 소개한다. 열전이 전하는 귀환의 꾀 정도로 읽는 편이 무리가 없다.

국경을 벗어나며 한 말
열전의 귀환은 60일에서 다시 시작한다. 춘추가 들어간 지 60일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유신은 나라 안의 용사 3천 명을 가려 뽑아 목숨을 걸자고 독려하고, 왕에게 청해 출병 날짜를 정했다. 이때 고구려의 첩자인 승려 덕창이 사람을 보내 고구려 왕에게 이를 알렸다. 왕은 이미 춘추의 맹세를 들은 데다 첩자의 말까지 듣자 더는 붙잡아 두지 못하고, 후하게 예우해 돌려보냈다.
신라본기와는 숫자도 장면도 다르다. 신라본기는 왕이 결사대 1만 명을 보냈고 유신이 한강을 넘어 고구려 남쪽 경계에 들어갔다고 했다. 열전에서 유신이 고른 용사는 3천 명이고, 이야기는 출병 날짜를 정한 데서 첩자의 보고로 넘어간다. 열전에는 국경을 넘었다는 말이 없다. 두 수가 같은 군대를 다르게 센 것인지, 서로 다른 단계를 적은 것인지는 기록만으로 가릴 수 없다.
국경을 벗어난 춘추는 배웅하던 사람에게 말했다. “나는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갚기 위해 군사를 청하려 왔던 것인데, 대왕께서 허락하지 않고 도리어 토지를 요구하였으나, 이것은 신하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난번에 대왕께 글을 올린 것은 죽음을 면하기 위해 한 것일 뿐이다.” 땅을 돌려주겠다던 약속은 국경을 넘자 없던 일이 되었다.
열전은 이 말 바로 뒤에 편찬자의 메모를 붙였다. 신라본기에 적힌 것과 “동일 사건이나 조금 다르다. 모두 고기(古記)에 전하므로 둘 다 남겨 둔다.” 원문은 ‘以皆古記所傳, 故两存之’다. 원문에는 본기의 ‘진평왕 12년’ 기사라고 되어 있지만, 교감과 주석은 선덕왕 11년을 잘못 적은 것으로 본다. 주석에 따르면 신라본기 기사의 원전은 고기로, 열전 기사의 원전은 김장청이 지은 《김유신행록》으로 이해된다.
같은 시기를 다룬 《삼국유사》 태종춘추공 조에서 청병 이야기를 찾으면, 고구려를 치려고 당에 들어가 군사를 청한 대목이 나온다. 같은 사람을 두 기록이 다르게 남긴 예로는 문익점의 졸기와 《고려사》 열전도 있다. 문익점 때는 서로 다른 두 책이 어긋났고, 김춘추의 고구려행은 한 책 안에서 편찬자가 차이를 알면서도 두 판본을 나란히 남긴 경우다.
참고 자료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5, 선덕왕 11년(642) 겨울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다」 국역·주석 · 원문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5, 선덕왕 11년 7월 기사 · 8월 대야성 함락 기사
《삼국사기》 권41 열전1 김유신 상, 「김춘추가 군사를 청하기 위해 고구려에 들어가다」 · 「고구려왕이 김춘추를 감옥에 가두다」 · 「선도해가 김춘추에게 거북이와 토끼 이야기를 들려주다」 · 「김춘추가 김유신의 도움으로 무사히 고구려에서 돌아오다」
《삼국사기》 권21 고구려본기9, 보장왕 원년(642) 「신라 김춘추의 청병을 거절하다」 · 보장왕 즉위년 기사
《삼국사기》 권20 고구려본기8, 영류왕 25년(642) 겨울 10월 기사
《삼국사기》 권45 열전5 온달, 「출정에 앞서서 맹세하다」
《삼국유사》 권1 기이 태종춘추공, 당에 청병한 대목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고대사료DB 국역·원문·역주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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