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3년 사정전의 병선 회의, 비변사가 지방에 물었던 맹선의 쓸모

중종 18년(1523) 6월 26일, 중종은 사정전에서 신하들을 맞았다. 의정부와 병조, 비변사에서 변방 일을 잘 아는 재상들이 함께 들어왔다. 안건은 병선이었다. 낡은 배를 고쳐 쓸지, 새 배를 만들지, 큰 배를 줄일지를 두고 말이 길어졌다. 《중종실록》 같은 날 기사는 그 회의를 거의 발언 순서대로 남겼다.

비변사라는 이름은 이 기사에 두 번 나온다. 한 번은 참석자 명단에서, 또 한 번은 지방에 의견을 물었던 기관으로서다. 임진왜란 뒤 나랏일 대부분을 다루던 비변사를 떠올리고 이 날짜를 읽으면 오히려 낯설다. 이날의 비변사는 여러 기관 사이에 앉아 배 이야기를 듣는 자리였다.

썩어 가는 큰 배, 쓸 데가 많은 큰 배

남곤이 먼저 지역 차이를 짚었다. 전라도와 경상도는 왜적의 침입이 잦아 병선을 5년, 길면 7~8년마다 고쳐 짓는 것이 관례였다. 충청도·경기도·황해도는 그렇지 못해 남은 병선을 조사해 보니 모두 부실했다. 그래서 새로 만들어야 한다고 하면서도, 이 세 도에서 늘 쓰는 대·중·소 맹선을 한꺼번에 없앨 수는 없다고 덧붙였다. 재목이 있는 황해도 장산곶과 전라도 변산에 감독할 관원을 따로 정하자는 제안도 그의 말이다.

고형산은 현장의 모습을 꺼냈다. 경상도와 전라도의 맹선은 쓰지 않고 내버려 두어 뭍에 매인 채 썩어 가고, 실제로 늘 쓰는 배는 비거도선이라는 것이다. 비거도선은 이날 여러 사람이 빠르고 가볍다고 말한 작은 배다. 그래도 그는 맹선을 없애자고 하지 않았다. 세곡을 배로 실어 나르는 조운에 맹선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해법은 숫자였다. 맹선이 4척이면 그중 2척을 가벼운 병선으로 고치자는 것이다.

작은 돛배 세 척이 노를 저어 포구를 떠나는 모습을 상상해 그린 한지 수채화

비변사의 이름이 다시 나오는 것은 안윤덕의 발언에서다. 신상이 전라도 관찰사로 있을 때, 비변사가 맹선을 없애는 것이 옳은지 물어 왔다. 전라도 쪽의 답은 반대였다. 비거도선은 맞붙어 싸울 때 빠르지만, 적이 바다를 뒤덮고 몰려오면 맹선이라야 군사를 많이 실을 수 있다는 이유였다. 비변사는 그 답을 옳게 여겨 임금에게 올렸다. 지방에 묻고, 답을 모아, 왕에게 올리는 일. 이 발언은 이 무렵 비변사가 하던 일을 구체적으로 보여 준다.

경상좌우도 수사를 지낸 조윤손의 말에는 배를 직접 부려 본 사람의 감각이 있다. 대맹선과 소맹선은 군인을 많이 실을 수 있지만 몸이 무거워 바람을 만나면 마음대로 부리지 못하고 뒤집힐 위험이 있었다. 비거도선은 사나운 바람에도 다루기 쉬웠다. 다만 경상좌도에는 많은데 우도에는 있다고 말하기 어려울 만큼 적었다고 한다. 쫓아가 붙잡는 날렵함과 많은 군사를 옮기는 덩치는 한 배에 담기 어려운 요구였다.

배는 있는데 배를 몰 사람이 없다

심순경은 충청 수사로 있을 때 본 포구를 이야기했다. 그곳에서도 큰 맹선은 쓰지 않고 비거도선만 쓰고 있었다. 조운 때가 되면 수군이 모두 배에 올라 떠나서 포구가 텅 비었다. 수군의 일은 직접 배를 익힌 사람이 아니라 고용되어 배를 탄 사람들이 대신했다. 정작 수군 자신은 집에 머물러 배를 다룰 줄 모르는 이가 많았다. 그는 “비록 배는 있다 하더라도 이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그가 덧붙인 일화는 더 날카롭다. 심의손이 왜적과 맞붙었을 때, 칼을 빼 든 왜적 한 사람이 돌진해 오자 포작선의 격군들이 모두 물속으로 뛰어들어 배가 비었다. 격군은 노를 젓는 사람이다. 다행히 적이 배에 오르지 못해 다친 사람은 없었다. 심순경은 이 말이 사실이라면 격군에게 죄를 물어야 한다고 했다.

배가 없는 빈 나루와 멀리 갯벌에서 소금을 굽는 사람들을 상상해 그린 한지 수채화

남곤은 경기도와 황해도의 수군이 소금을 굽고 바다에서 해물을 거두는 일을 모두 맡아 하루도 진에 머물 틈이 없다고 했다. 김극성은 수군이 바치는 물선을 직접 거두지 않고 값을 들고 서울에 올라와 사서 바친다며 그 폐단을 짚었다. 그는 경상도·전라도에서도 수군 5백 명 가운데 활을 쏠 수 있는 사람은 30여 명뿐이라고 했다. 이 숫자들은 회의에서 나온 관료의 진술이고, 따로 조사한 통계는 아니다.

왜선 한 척 때문에 관직을 새로 만들 수는 없다

회의 후반에는 경기도와 황해도에 수사를 다시 둘지가 나왔다. 남곤은 경기도 화량은 예전에도 수사가 있던 큰 진이니 다시 두어도 되지만, 황해도는 영을 새로 만들어야 하고 거기 소속시킬 사람도 없다며 반대했다. 이항은 왜선 한 척이 변방에 나타난 일로 놀라 수사를 두는 것은 보기에도 옳지 않다고 했다. 중종의 답도 같았다. 관제는 선대 임금들이 정한 것인데, 왜선 1척 때문에 갑자기 없던 관직을 만드는 것은 사체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마지막은 책임 문제였다. 황해도에서 왜적을 잡지 못한 첨사·만호·수령을 모두 파직하면 소요가 일까 걱정한 중종은 더 심한 사람만 가려내자고 물었다. 남곤은 관찰사의 보고만으로는 사실대로 가리기 어렵다고 답했고, 실록은 조정 관원을 보내 조사하자는 데서 이 기사를 끝맺는다. 배의 크기를 묻던 자리가 사람을 어떻게 움직이고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지로 옮겨 간 셈이다.

이 기사만으로 비변사가 언제 처음 생겼는지, 훗날 어떤 권한까지 가졌는지 말할 수는 없다. 그래도 1523년 여름의 비변사가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보인다. 의정부·병조와 나란히 앉았고, 지방의 답을 모아 올렸다. 읽고 나서 오래 남은 것은 기관의 이름보다 뭍에 매여 썩어 가던 맹선과, 조운 때마다 비어 버리던 포구였다.

참고 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중종실록》 48권, 중종 18년(1523) 6월 26일 다섯째 기사. 이 글의 발언과 논의 순서는 이 기사의 국역을 따랐다. 소재의 출발점은 예전에 쓴 비변사 소개 글이고, 이 글은 1523년 하루의 병선 회의로 질문을 좁혔다.

실록 기사 한 편을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 읽은 글로는 계유정난 실록 읽기가 있고, 백성이 임금에게 닿는 길을 다룬 신문고 이야기도 함께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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