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령왕릉의 닫힌 입구는 무엇을 증명했나 — 1971년 발견의 순서

1971년 7월 8일 아침 8시, 공주 송산리의 발굴단은 전날 밤 큰비로 멈춘 흙 파기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발굴조사보고서는 입구를 막은 벽돌 바깥에 단단한 석회층이 콘크리트처럼 입혀져 있어, 입구가 다 드러난 것은 오후 3시 무렵이었다고 적습니다. 이 장면만 보면 무령왕릉이 도굴을 피한 까닭으로 단단히 막은 입구나 잊힌 위치부터 떠오릅니다. 하지만 1971년의 기록은 발견 당시 무덤의 상태를 적었을 뿐, 도굴을 피한 원인을 하나로 짚지는 않습니다.

7월 5일 배수로 공사 중에 벽돌 구조가 나왔고, 뒤이어 폐쇄부가 열리자 입구 안쪽에서 석수와 지석이 보였습니다. 이 순서를 날짜대로 따라가면 ‘도굴되지 않은 상태’라는 사실과 ‘왜 도굴되지 않았는가’라는 해석이 어디서 갈리는지 알 수 있습니다.

발견의 시작은 배수로 공사였다

1971년 여름 송산리 6호분에는 물이 스며들어 벽화 훼손이 우려됐고, 그 뒤편에 물길을 내는 공사가 진행됐습니다. 보고서는 5호분과 6호분의 침수를 막으려는 이 공사가 6월 29일에 시작됐다고 적습니다. 국가기록원의 무령왕릉 기록은 7월 5일 인부의 삽이 단단한 물체에 닿았고, 흙 아래에서 아치형 벽돌 구조가 나타났다고 전합니다.

공사는 이미 알려진 6호분을 지키려는 것이었고, 별도의 입구는 그 물길을 내다가 나왔습니다. 발견 전까지 이 무덤의 존재가 뚜렷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는 정황은 여기서 확인됩니다. 그렇다고 위치가 잊힌 것이 도굴을 피한 유일한 이유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입구를 연 뒤 확인된 무덤의 상태

보고서에 따르면 7월 8일 오후 입구 앞에서 위령제를 지낸 뒤, 5시부터 김원룡과 김영배가 입구를 막은 벽돌을 뜯어내기 시작했습니다. 국가기록원의 정리에는 맨 위 벽돌 두 장을 들어내자 안팎의 온도 차이로 흰 수증기가 새어 나왔다는 장면도 남아 있습니다.

뚫린 틈으로 들여다본 연도에는 석수와 지석이 놓여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폐쇄 벽돌을 무릎 높이만큼 남긴 채 연도로 들어가, 지석이 무령왕과 왕비의 것이고 현실 내부가 교란되지 않은 ‘처녀분’임을 확인한 뒤 밖으로 나와 발표했다고 보고서는 적습니다. 우리역사넷 해설에 따르면 당시 송산리에 남아 있던 1~6호분은 일제강점기에 유물이 도굴돼 주인을 알 수 없는 무덤이었습니다.

흙 아래 닫힌 입구를 상상한 한지 수채화 삽화, 실제 무령왕릉 구조나 발굴 현장 복원도가 아님

‘도굴되지 않았다’와 ‘그 이유를 안다’는 다르다

닫힌 입구와 교란되지 않은 내부는 미도굴 상태를 뒷받침합니다. 여기까지는 발굴 현장에서 확인한 사실입니다. 반면 “봉분이 작아서”, “입구가 단단해서”, “정확한 위치가 잊혀서” 살아남았다는 설명은 여러 정황을 묶은 해석입니다. 저마다 가능성은 있지만, 당시 누군가가 도굴을 포기한 과정이나 1,400여 년 동안 침입이 없었던 이유를 직접 적은 기록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벽돌과 석회로 입구를 막았다는 사실도 그것만으로는 답이 되지 않습니다. 같은 왕릉원에서 무령왕릉처럼 벽돌로 쌓은 6호분도 도굴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무령왕릉이 보존된 까닭을 구조 하나의 효과로 돌리기는 어렵습니다. 발견 전까지 알려지지 않은 위치, 닫혀 있던 폐쇄부, 실제 내부 상태는 각각 따로 따져 볼 증거입니다.

빈 기록장과 솔이 놓인 조사 작업대를 상상한 한지 수채화 삽화, 실제 발굴 기록이나 지석 사진이 아님

지석에 새겨진 이름과 날짜

입구에서 확인된 지석은 두 매였습니다. 국가기록원이 옮긴 명문에 따르면 왕의 지석은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 62세 되던 계묘년 5월 7일에 세상을 떠났고, 을사년 8월 12일 대묘에 안장했다고 새겼습니다. 계묘년과 을사년은 523년과 525년이고, 사마는 무령왕의 이름입니다.

왕비 지석은 526년 11월 사망과 529년 2월 안장 시점을 전합니다. 국가유산포털의 지석 설명에 따르면 이 돌은 원래 무령왕을 장사 지낼 때 묘소로 쓸 땅을 땅의 신에게서 샀다는 매지권을 새긴 것이었고, 뒤에 왕비를 합장하면서 그 뒷면에 왕비의 묘지문을 새겼습니다. 지석대로라면 왕과 왕비는 각자 세상을 떠난 지 2년여 뒤에 차례로 안장됐습니다. 양식으로 짐작할 필요 없이, 무덤 안에 남은 문자 기록으로 주인과 장례 시점을 특정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지석과 유물을 함께 놓고 읽을 수 있었던 것도 내부가 크게 교란되지 않은 채 발견됐기 때문입니다.

온전한 무덤도 발굴 과정에서 맥락을 잃을 수 있었다

무령왕릉은 도굴을 피했지만 발굴 기록에는 빈틈이 남았습니다. 보고서는 지석 확인 발표가 전파를 타자 보도진과 일반 관람객이 더 늘었고, 조사단 전원이 의논한 끝에 내부 조사를 가능한 한 빨리 이어 가기로 했다고 적습니다. 발전기를 놓고 오후 8시부터 사진 촬영과 실측을, 10시부터 유물 수습을 시작해 이튿날인 7월 9일 오전 9시에 현실 내부 유물 전체의 수습을 마쳤습니다. 국가기록원은 이 결정을 사고를 막고 유물 손실을 피하려는 압박 때문이었다고 설명합니다. 같은 설명에 따르면 육안으로 보이는 유물을 옮긴 뒤 남은 잔존물은 삽으로 떠 포대에 담았고, 유물이 놓여 있던 현장에 관해 남은 자료는 무덤의 실측 자료와 사진 몇 장뿐이었습니다.

‘보존’이라는 말에는 무덤이 열리기 전까지 살아남는 일과, 열린 뒤 위치 관계를 기록하며 조사하는 일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무령왕릉은 앞의 일에서 드문 행운을 얻었습니다. 뒤의 일에서는 당시 한국 고고학의 경험과 현장 통제가 어디까지였는지가 드러났습니다. 발굴조사보고서와 후대의 재검토를 같이 읽어야 하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기록과 지금 남은 자료를 나눠 읽는 일은 팔만대장경의 발원 기록을 다룬 글과 서희의 담판 뒤 열전에 남은 축성 기록에서도 다뤘습니다.

지석의 장례 날짜와 1971년의 조사

시점기록에서 확인되는 일의미
523년 5월 7일사마왕이 62세에 사망지석이 밝힌 왕의 사망
525년 8월 12일왕을 대묘에 안장사망 2년여 뒤의 안장
526년 11월왕비 사망왕비 지석의 별도 장례 기록
529년 2월왕비를 안장왕과 왕비의 합장 완성
1971년 7월 5~9일입구 발견, 지석 확인, 철야 수습무덤 주인과 유물 맥락 확인

조사는 그 하룻밤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보고서에 따르면 8월 17~29일에 봉토와 외부 구조를 살핀 2차 조사가, 9월 14~21일과 10월 26~28일에 3·4차 소규모 조사가 이어졌습니다. 이 조사들을 조사 경위부터 구조, 부장품, 과학적 보존 연구까지 11장으로 묶은 보고서는 1974년 7월에 발행됐습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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