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겨우 강 안쪽을 수복하였으니.” 소손녕의 군영에서 돌아온 서희가 성종에게 한 말이다. 《고려사》 권94 열전 서희의 담판 기사는 말로 거란군을 돌려보낸 장면 바로 뒤에 이 문장을 싣는다. 왕은 기뻐서 강가까지 마중을 나왔는데, 정작 돌아온 사람은 ‘겨우’라고 했다.
서희의 담판은 993년(성종 12)의 회담 한 번으로 끝난 일이 아니었다. 열전이 전하는 순서로는 회담이 거란군을 멈추게 했고, 성을 쌓는 일은 이듬해인 994년부터 세 해에 걸쳐 이어졌다. 회담 자리의 문답은 널리 알려졌지만, 같은 기사의 마지막 몇 줄은 덜 읽힌다. 아래에서는 그 끝부분을 따라간다.
회담 전에 조정은 땅을 떼어 주려 했다
기사는 패전 소식에서 시작한다. 거란의 동경유수 소손녕이 봉산군을 깨뜨리고 고려의 선봉군사 윤서안 등을 사로잡았다. 서경을 거쳐 안북부까지 나아가 있던 성종은 더 나아가지 못하고 돌아왔다. 소손녕은 80만 군사가 왔다고 편지에 썼다. 이 숫자는 소손녕이 항복을 재촉하며 쓴 글에 나온 것이고, 기사는 실제 병력을 따로 세지 않는다.
신하들의 의견은 둘로 갈렸다. 왕은 개경으로 돌아가고 중신이 군사를 이끌고 가서 항복을 청하자는 쪽이 있었다.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 주고 황주에서 절령까지를 국경으로 삼자는 쪽도 있었다. 성종은 뒤의 의견을 따르려 했다. 서경 창고의 쌀을 백성이 가져가게 하고, 그래도 남은 곡식은 적의 군량이 될까 걱정해 대동강에 던지라고 명했다.
서희는 이때 두 번 말한다. 먼저 쌀이다. 그는 식량이 넉넉하면 성을 지킬 수 있다고 했고, 식량은 백성의 생명이니 적의 군량이 되더라도 강에 버릴 수는 없다고 했다. 성종은 명을 거두었다. 다음은 땅이다. 서희는 거란의 동경에서 안북부까지 수백 리가 본래 생여진이 살던 곳이며 광종이 그 땅을 빼앗아 가주와 송성 등의 성을 쌓았다고 설명한다. 거란이 노리는 것은 이 두 성에 지나지 않는다는 판단이 뒤따른다. 그러니 한 번 싸워 본 뒤에 다시 의논해도 늦지 않다고 했다.
서희 혼자 반대한 것도 아니다. 전 민관어사 이지백이 땅을 가볍게 내주는 일을 통탄스럽다고 아뢰었고, 성종은 그 말도 옳게 여겼다고 기사는 적는다. 그 사이 소손녕은 안융진을 공격했다. 중랑장 대도수와 낭장 유방이 싸워 이겼고, 소손녕은 다시 진군하지 못한 채 대신을 군영으로 보내라고 요구했다. 누가 가겠느냐는 왕의 물음에 응한 사람이 서희 하나였다는 대목은 이 다음에 나온다.

마주 앉기까지 걸린 실랑이
회담은 절하는 자리를 정하는 문제로 먼저 멈췄다. 소손녕은 자신이 큰 조정의 귀인이니 서희가 뜰에서 절해야 한다고 했다. 서희는 두 나라의 대신이 만나는 자리에서 그럴 수 없다고 맞섰다. 사람이 두세 번 오갔으나 허락이 떨어지지 않자 서희는 관사로 돌아가 누워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두 사람은 뜰에서 서로 절하고 마루에 올라 동서로 마주 앉았다.
소손녕의 주장은 두 가지였다. 고려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거란의 것인데 고려가 침범했다는 것. 그리고 국경을 맞대고도 바다 건너 송을 섬긴다는 것. 서희의 답도 두 갈래로 적혀 있다. 나라 이름을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한 것은 고구려의 옛 땅이기 때문이라는 반박이 하나다. 다른 하나는 길에 관한 말이다. 압록강 안팎을 여진이 차지하고 길을 막아 거란으로 가는 일이 바다를 건너기보다 어렵다고 했다.
내가 이 문답에서 다시 읽은 곳은 서희가 내건 조건의 시제다. 그는 여진을 쫓아내고 옛 땅을 돌려주어 성과 보루를 쌓고 도로를 통하게 해 준다면 조빙을 하겠다고 말한다. 조빙은 사신이 오가며 예를 갖추는 일이다. 서희의 말에서 성 쌓기는 이미 끝난 일을 인정받는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해야 할 일이었다. 거란 황제의 답으로 기사에 실린 문장은 하나뿐이다. 고려가 이미 강화를 청해 왔으니 군사 행동을 멈추라는 것이다. 어느 땅을 어디까지 넘긴다는 거란 쪽 문장은 이 기사 안에 없다.
서희는 거란 군영에 7일을 머물렀다. 돌아올 때 소손녕은 낙타 10마리, 말 100필, 양 1,000마리, 비단 500필을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겨우 강 안쪽’이라는 보고
성종은 곧바로 박양유를 예폐사로 삼아 거란에 들여보내려 했다. 서희는 말렸다. 여진을 평정하고 옛 땅을 되찾은 뒤에야 조근을 하기로 소손녕과 약속했는데, 지금은 겨우 강 안쪽을 수복했을 뿐이라는 이유였다. 강 밖의 땅까지 얻은 다음에 빙례를 행해도 늦지 않다고 그는 아뢰었다.
왕의 생각은 달랐다. 오래 수교하지 않으면 후환이 생길까 두렵다는 것이 성종의 답이고, 박양유는 그대로 떠났다. 열전은 이 엇갈림에 평을 달지 않는다. 다음 문장은 서희가 평장사로 옮겼다는 인사 기록이다. 회담의 주역이 낸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장면이 승전담 한가운데 그대로 남은 셈이다. 서희가 말한 ‘강 밖’이 그 뒤 어떻게 되었는지는 이 기사에 남아 있지 않다.

여덟 지명과 세 해
기사의 마지막은 연도와 지명의 나열이다. 성종 13년(994) 서희는 군사를 거느리고 여진을 쫓아낸 뒤 장흥진과 귀화진, 곽주와 귀주에 성을 쌓았다. 이듬해에는 다시 군사를 거느리고 안의진과 흥화진에 성을 쌓았다. 그 이듬해에는 선주와 맹주였다. 세 해 동안 여덟 곳이다.
국사편찬위원회 데이터베이스는 이 기사에 ‘강동6주 지역을 확보하다’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런데 국역 본문에는 ‘6주’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본문이 세는 것은 진 넷과 주 넷이다. 여섯 고을을 한데 묶어 부르는 말이 언제부터 쓰였는지는 이 기사만으로는 알 수 없다. 그래서 여기서는 열전이 적은 여덟 지명을 그대로 옮기는 데서 멈춘다.
읽을 때 하나 더 감안할 점이 있다. 《고려사》는 국사편찬위원회 고려시대 사료 DB의 소개대로 1451년 조선에서 편찬한 책이다. 회담 자리의 말투까지 살아 있는 문답은 사건으로부터 450여 년 뒤에 정리된 기록으로 전한다. 같은 열전의 첫 기사는 서희가 광종 11년(960)에 18세로 갑과에 급제했다고 적는데, 이 나이를 그대로 따라 셈하면 담판 무렵 그는 쉰을 넘긴 대신이었다.
군사를 움직인 다음에 오간 말과 글이 무엇을 약속했는지 따져 읽는 일은 1419년 대마도 원정 뒤의 편지를 다룬 글에서도 했다. 전쟁 한가운데서 쓰인 글의 목적을 물었던 팔만대장경 기도문 이야기와도 닿는 질문이다. 서희 열전에서 오래 남는 것은 마주 앉아 주고받은 문답보다 그 뒤에 붙은 짧은 문장들이다. 왕이 강가에서 손을 잡아 보낸 사람은 돌아온 이듬해부터 세 해를 연달아 북쪽에 성을 쌓았다.
참고 자료
《고려사》 권94 열전7 제신 서희, 성종 12년(993) 소손녕과의 담판 및 성종 13년(994) 이후 축성 기사 — 국사편찬위원회 고려시대 사료 DB 국역
《고려사》 권94 열전7 제신 서희, 급제 기사
국사편찬위원회 고려시대 사료 DB, 《고려사》 자료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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