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알지의 숲 계림이 국호가 되었다는 한 줄과 663년 당의 책봉

‘시림의 이름을 계림이라고 바꾸었는데, 이로 인해 계림이 국호가 되었다.’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 탈해이사금 9년(65) 3월 기사는 김알지가 발견된 이야기를 이 문장으로 끝맺는다. 그해 봄밤 왕은 금성 서쪽 시림의 나무 사이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들었고, 날이 밝자 호공을 보냈다. 나뭇가지에는 금빛 작은 궤짝이 걸려 있었고 그 아래에서 흰 닭이 울었다. 궤짝 안에는 사내아이가 있었다.

숲 이름이 나라 이름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이 한 문장에서 나온다. 그런데 같은 기사에 붙은 국사편찬위원회 주석은 계림이 7세기 이전에 공식 국호로 쓰인 흔적을 금석문을 비롯한 다른 자료에서 찾을 수 없다고 적는다. 같은 발견담을 전하는 《삼국유사》 「김알지 탈해왕대」 조에는 국호 이야기가 아예 없고, 날짜도 왕이 숲에 직접 갔는지도 다르다.

숲속 바위에 깔린 흰 천 위의 금빛 상자를 상상해 그린 한지 수채화

숲에 다녀온 사람은 호공뿐이었다

이 기사에서 숲에 들어간 사람으로 이름이 나오는 이는 호공 하나다. 왕은 소리를 들었고 호공을 보냈으며, 보고를 받은 뒤에는 다시 사람을 시켜 궤짝을 가져오게 했다. 원문 ‘王使人取櫝開之’는 왕이 사람을 시켜 궤짝을 가져와 열었다는 뜻인데, 연 손이 왕인지 심부름한 사람인지까지 가르지는 않는다. 분명한 것은 왕이 숲으로 나갔다는 말이 없다는 점이다.

궤짝 속 아이는 생김새가 빼어났다. 왕은 기뻐하며 좌우 신하들에게 “이 아이는 어찌 하늘이 나에게 좋은 후계를 보낸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하고 거두어 길렀다. 이름은 아이가 자라 총명하고 지략이 많아진 뒤에야 붙는다. 기사는 이름을 알지라 했다고만 적고 그 뜻은 풀지 않는다. 김이라는 성은 금궤에서 나왔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알지가 그 뒤 어떤 자리에 올랐는지는 같은 책의 다른 권에 나온다. 권2 미추이사금 즉위 기사(262)는 김씨로서 처음 왕이 된 미추의 계보를 적으면서, 알지가 계림에서 나왔고 탈해왕이 거두어 궁중에서 기르다가 나중에 대보로 삼았다고 쓴다. 주석은 대보를 국정을 총괄한 최고 직위로 추정한다.

영평 3년 8월 4일, 호공의 밤길

《삼국유사》 권1 기이 「김알지 탈해왕대」는 날짜부터 다르게 연다. 영평 3년 경신 8월 4일. 영평은 58년에 시작된 후한 명제의 연호라서 3년은 60년, 곧 탈해왕 4년이다. 《삼국사기》의 탈해이사금 9년(65)과는 다섯 해가 벌어지고, 달도 3월이 아니라 8월이다. 본문 사이에 ‘중원 6년이라고도 하나 잘못이다’라는 작은 주도 끼어 있어, 또 다른 날짜를 전하는 이야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처음 무언가를 본 사람도 바뀐다.

이 기록에서 밤길에 있던 사람은 왕이 아니라 호공이다. 호공은 밤에 월성 서리(西里)를 지나다가 시림 한가운데서 크고 밝은 빛을 보았다. 자색 구름이 하늘에서 땅까지 드리웠고, 그 구름 속 나뭇가지에 황금 궤가 걸려 빛을 내고 있었다. 흰 닭은 여기서도 나무 아래에서 운다. 닭 울음으로 시작하는 《삼국사기》와 달리 《삼국유사》는 빛과 구름을 먼저 보여 준다.

밤길의 작은 사람이 보랏빛 구름이 내려앉은 숲을 바라보는 모습을 상상해 그린 한지 수채화

호공이 본 모습을 그대로 아뢰자 왕은 수레를 타고 숲으로 가서 직접 궤를 열었다. 원문은 ‘駕幸其林開樻’다. 누워 있던 사내아이가 곧 일어났는데, 기록은 이것이 혁거세의 옛일과 같다며 그 말을 따라 이름을 알지라 지었다고 쓴다. 《삼국사기》가 풀지 않은 이름의 뜻도 적었다. 알지는 우리말로 어린아이를 부르는 말이라는 것이다.

왕이 아이를 안아 수레에 싣고 궁으로 돌아오자 새와 짐승이 서로 따르며 기뻐 뛰놀았다. 왕은 길일을 골라 아이를 태자로 책봉했다. 알지는 뒤에 그 자리를 파사에게 물려주고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 알지가 받은 지위도 《삼국사기》는 대보, 《삼국유사》는 태자로 다르다. 이 조의 뒷부분은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김씨라 했다는 설명과 알지에서 미추까지 이어지는 계보로 끝난다. 나라 이름을 바꿨다는 말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오지 않는다.

《삼국유사》가 적은 계림국의 두 가지 유래

그렇다고 《삼국유사》가 계림이라는 국호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 이야기는 같은 권1의 「신라시조 혁거세왕」 조에 있다. 나라 이름을 서라벌, 서벌, 사라, 사로라고도 했다는 설명 끝에 이런 문장이 이어진다. 처음에 왕이 계정에서 났으므로 계림국이라고도 하니 계룡이 상서를 보였기 때문이다. 일설에는 탈해왕 때 김알지를 얻으면서 숲에서 닭이 울었으므로 국호를 계림으로 고쳤다고 한다. 후세에 마침내 신라라는 이름으로 정했다.

여기서 김알지 이야기는 ‘일설’ 자리에 있다. 계림국이라는 이름을 먼저 시조 혁거세의 탄생과 계룡의 상서에 잇고, 알지와 닭 울음은 다른 설명으로 덧붙였다. 《삼국사기》에는 이런 갈래가 없다. 알지 이야기 하나만 실려 있고, 그 일이 일어난 해도 탈해이사금 9년으로 정해져 있다.

기림이사금의 ‘다시 신라’와 지증마립간의 신하들

《삼국사기》 권2 기림이사금 10년(307) 기사는 ‘復國號新羅’, 나라 이름을 다시 신라로 했다는 한 구절이 전부다. 탈해이사금 9년에서 242년이 지난 해다. 주석은 이것이 503년의 일이 잘못 들어간 기사일 수도 있지만, ‘다시’라는 글자가 있어 별개의 일일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그로부터 196년 뒤인 지증마립간 4년(503) 겨울 10월, 여러 신하가 왕에게 아뢰었다. 시조께서 나라를 세운 뒤로 국호를 정하지 않아 사라라고도 하고 사로라고도 하며 신라라고도 했으니, ‘신’은 덕업이 날로 새로워진다는 뜻이고 ‘라’는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이므로 신라를 국호로 삼자는 것이었다. 왕은 이를 따랐다. 나라 이름을 두고 왕과 신하가 주고받은 말이 기록에 남은 장면은 훨씬 뒤 1897년 국호 ‘대한’을 정하던 날에도 있다.

신하들이 꼽은 옛 이름 가운데 계림은 없다.

한 책 안에서 탈해 9년에는 계림을 국호로 삼고 기림 10년에는 다시 신라로 했다고 적어 놓고, 503년 신하들의 말로는 국호를 정한 적이 없다고 전한다. 이 기사의 주석은 503년 9월 25일에 세운 포항 냉수리 신라비에 ‘사라’라는 국호가 보인다고 덧붙이고, 탈해 때 계림을 국호로 썼다는 데는 구체적 근거가 부족하다고 본다. 《삼국사기》 안에 서로 잘 맞지 않는 기사가 나란히 남은 예는 김춘추의 642년 고구려 청병 기록에도 있다.

663년, 당이 신라에 붙인 이름

탈해 9년 기사의 주석이 신라를 계림이라 부르게 된 출발점으로 꼽는 기사는 권6에 있다. 문무왕 3년(663) 여름 4월, 당이 신라를 계림대도독부로 삼고 왕을 계림주대도독으로 삼았다. 원문은 ‘大唐以我國爲雞林大都督府’다. 백제가 무너진 지 3년째, 신라군이 아직 백제 땅의 성들을 치고 있던 해다.

이 기사의 주석은 계림대도독부를, 당이 다른 민족의 땅에 도독부를 두고 그 땅의 수장을 도독으로 삼던 기미부주의 이름으로 설명한다. 백제 땅에 도독부를 둔 것처럼 신라도 그 체제 안에 넣으려는 의도였다는 것이다.

당이 왜 하필 계림이라는 이름을 골랐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탈해 9년 기사의 주석은 《삼국유사》 「귀축제사」 조에서 천축에서 신라를 ‘계귀(雞貴)’라는 뜻의 ‘구구타예설라’로 부르고 그 나라가 닭 신을 받든다고 한 대목을 들어, 바깥에서 신라를 떠올릴 때 닭을 연상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같은 주석은 방향이 다른 견해도 소개한다. 《삼국유사》 「나물왕 김제상」 조와 「가락국기」 등에 국호로 나오는 계림을 신라 초기의 사정으로 보고, 김씨 세력이 경주 지역에 세운 소국의 이름이 계림국이었다는 해석(노중국, 1990)이다.

한쪽은 이 이름의 출처를 7세기 당의 책봉에서, 다른 쪽은 신라 초기 경주의 작은 나라에서 찾는다.

안내문 한 편에 함께 실린 65년과 60년

경주 계림은 지금 사적이다.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의 ‘경주 계림’ 안내에는 설명이 두 갈래로 실려 있다. 긴 설명은 《삼국사기》를 따라 탈해왕 9년(65)의 일로 쓰면서 왕이 호공을 보내고 사람을 시켜 궤짝을 열어 보게 했다고 적은 뒤, 이름의 뜻은 《삼국유사》에서 가져왔다고 밝히고 알지가 태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잇는다.

짧은 설명은 탈해왕 4년(60)으로 시작한다. 왕이 닭 울음과 환한 빛을 알아채 날이 밝은 뒤 신하를 보냈고, 보고를 받자 곧장 시림으로 가서 궤짝을 열었으며, 아이를 태자로 삼고 아기라는 뜻의 이름을 주었다고 한다. 60년이라는 연도와 빛, 왕의 행차, 태자, 이름의 뜻은 《삼국유사》 쪽이고, 왕이 먼저 소리를 듣고 신하를 보낸 순서는 《삼국사기》 쪽이다. 두 책이 따로 전한 장면이 한 문단 안에서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져 있다.

안내문은 숲 안에 조선 순조 3년(1803)에 세운 김알지 탄생 기록비가 있다고도 전한다. 그 비석이 65년과 60년 가운데 어느 해를 새겼는지, 숲 이름이 나라 이름이 되었다는 문장까지 옮겼는지는 비문 원문을 찾아야 알 수 있다.

참고 자료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삼국사기》 권1 탈해이사금 9년(65) 3월(원문), 권2 미추이사금 즉위년(262), 권2 기림이사금 10년(307), 권4 지증마립간 4년(503) 10월, 권6 문무왕 3년(663) 4월. 《삼국유사》 권1 기이 「김알지 탈해왕대」 앞부분(원문)과 뒷부분, 권1 기이 「신라시조 혁거세왕」 국호 대목. 인용은 국사편찬위원회 국역을 원문과 대조해 따랐다.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사적 ‘경주 계림’(2026년 10월 22일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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