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미륵사지 서탑 1층 안에는 네 방향에서 들어온 통로가 한가운데서 만나는 십자 모양 공간이 있다. 그 교차점에는 네모난 돌을 위로 포개 쌓은 기둥이 서 있다. 기둥은 4층까지 이어진다. 1915년 무너진 쪽에 콘크리트를 덧씌운 채 전해지던 탑은 2001년부터 돌을 하나씩 내리며 해체 조사를 받았다. 2009년 1월, 국립문화재연구소는 기둥 맨 아래 첫 번째 돌에 파 놓은 사리공에서 봉안 당시 그대로 남은 유물을 찾아냈다. 금동 사리호와 크기가 제각각인 청동 그릇, 구슬, 그리고 가로 15.5센티미터, 세로 10.5센티미터의 얇은 금판 한 장이었다.
금판 앞면과 뒷면에는 11줄씩 모두 193자가 새겨져 있다. 획을 파낸 자리에 붉은 칠을 넣어 글자가 또렷하다. 사리를 모신 사람을 밝히는 대목은 “우리 백제 왕후께서는 좌평 사택적덕의 따님으로”라고 시작한다. 왕후가 누구의 딸인지는 분명히 적었는데, 정작 왕후 자신의 이름은 193자 어디에도 없다.
대왕 폐하와 사택적덕의 딸
금판의 글은 네 덩어리로 나뉜다. 첫머리는 부처를 기리는 말이다. 부처가 왕궁에 태어나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들며 여덟 곡의 사리를 남겼고, 오색으로 빛나는 사리를 일곱 번 돌면 그 신통한 변화를 헤아릴 수 없다고 적었다.
두 번째 덩어리에서 왕후가 나온다. 아득한 세월 동안 착한 씨앗을 심어 이번 생에 좋은 과보를 받았고, 만백성을 어루만져 기르며 삼보의 기둥이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깨끗한 재물을 내어 가람을 세우고, 기해년 정월 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맞이했다고 한다. 나머지 두 덩어리는 축원이다. 대왕 폐하의 수명이 산악처럼 굳고 치세가 천지와 함께 오래가기를, 위로는 바른 법을 넓히고 아래로는 백성을 교화하기를 빈다. 이어 왕후의 몸과 마음이 물거울처럼 법계를 늘 밝게 비추고, 금강 같은 몸이 허공처럼 사라지지 않으며, 일곱 대에 이르기까지 함께 복을 입기를 빈다.
이 글에서 왕은 이름도 시호도 없이 ‘대왕 폐하’로만 불린다. 기해년을 무왕 40년인 639년으로 읽기 때문에 대왕 폐하는 무왕을 가리킨다. 왕후도 이름은 없지만 아버지의 관직과 이름은 적혀 있다. 좌평은 백제의 가장 높은 관직이다. ‘좌평 사택적덕의 딸’이라는 소개만으로 왕후가 어떤 집안에서 왔는지가 드러난다.
이 대목의 표기는 판독문을 옮긴 곳마다 조금씩 다르다. 국사편찬위원회 판독문은 성의 둘째 글자를 ‘乇’으로 옮기고 괄호 안에 ‘宅’을 덧붙였다. 국가유산청 설명은 처음부터 ‘沙宅積德’으로 쓴다. 금판을 부르는 이름도 갈린다. 국사편찬위원회 자료는 ‘금제 사리봉안기’, 국가유산청과 국립익산박물관은 ‘금제 사리봉영기’라고 한다. 금판 본문에 쓰인 동사 ‘奉迎’은 받들어 맞이한다는 말이다.

백제 기록 속 왕비들은 어떻게 불렸나
왕실 여성의 이름이 빠진 기록은 이 금판만이 아니다. 1971년 무령왕릉에서 나온 지석 두 장을 나란히 놓으면 차이가 바로 보인다. 왕의 지석은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으로 시작한다. 사마는 무령왕의 이름이다. 왕비의 지석은 ‘병오년 12월 백제국 왕대비가 천명대로 살다가 돌아가셨다’고만 적었다.
2007년 부여 왕흥사지 목탑 자리에서 나온 사리기 명문은 577년의 기록이다. 여기에는 백제 왕 창(昌)이 죽은 왕자를 위해 절을 세웠다고 적혀 있다. 창은 위덕왕의 이름인데, 그 왕자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셋 다 사리나 무덤에 넣으려고 쓴 짧은 글이고, 세 점만으로 백제의 관습을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왕비가 직함이나 아버지를 통해서만 글에 남는다는 점은 같다. 미륵사 금판은 거기에 더해 왕의 이름까지 빼고 ‘대왕 폐하’라고만 썼다.
《삼국유사》의 미륵사는 연못에서 시작한다
서동 이야기는 《삼국유사》 권2 기이편 무왕조에 실려 있다. 무왕의 이름은 장(璋)이다. 과부였던 어머니가 서울 남쪽 못가에 살다가 못의 용과 관계해 그를 낳았고, 그는 늘 마를 캐다 팔아 살았기에 사람들이 서동이라 불렀다고 한다. 서동은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 선화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머리를 깎은 채 신라 서울로 가서, 마를 얻어먹은 아이들에게 노래를 퍼뜨렸다.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사귀어 두고 서동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이 노래 때문에 공주는 귀양길에 올랐고, 어머니 왕후는 노자로 순금 한 말을 쥐여 주었다.
백제로 온 공주가 그 금을 내놓자 서동은 크게 웃으며, 어릴 때 마를 캐던 곳에 그런 것이 흙처럼 쌓여 있다고 했다. 둘은 금을 언덕처럼 모아 용화산 사자사의 지명법사를 찾아갔고, 법사는 신통한 힘으로 하룻밤 사이에 그 금을 신라 궁중으로 보냈다. 진평왕은 서동을 더욱 존경하게 되었고, 서동은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
미륵사 이야기는 그다음이다. 무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로 가다가 용화산 아래 큰 못에 이르자 못 가운데서 미륵삼존이 나타났다. 왕은 수레를 멈추고 절했다. 부인이 “이곳에 큰 절을 지어 주십시오. 그것이 제 소원입니다”라고 하자 왕은 허락했다. 지명법사가 하룻밤 사이에 산을 무너뜨려 못을 메웠고, 미륵삼회의 모습을 본떠 전각과 탑과 회랑을 각각 세 곳에 세웠다. 진평왕이 여러 공인을 보내 도왔다는 말도 붙어 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일연은 절을 청한 사람을 ‘부인’이라고만 쓴다. 앞 이야기와 이어 읽으면 선화공주로 받아들일 뿐, 미륵사 대목 안에는 선화라는 이름이 다시 나오지 않는다. 일연은 끝에 ‘국사에서는 왕흥사라 했다’는 주를 달고, 《삼국사》는 무왕을 법왕의 아들이라 했는데 여기서는 과부의 아들이라 하니 자세히 알 수 없다고 덧붙였다. 편찬자도 전승이 서로 어긋난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세 곳’이라는 숫자는 발굴로 드러난 절의 배치와 맞아떨어진다. 미륵사지는 탑과 금당이 세 벌인 3탑 3금당 구조이고, 지금 남은 석탑은 그 가운데 서쪽 탑이다. 반면 《삼국사기》의 무왕은 신라 변경을 자주 공격한 왕으로 나온다. 신라 왕이 공인을 보내 사위의 절을 도왔다는 이야기와는 결이 사뭇 다르다.
금판이 나온 뒤 갈라진 읽기
2009년 이후 두 기록을 어떻게 맞출지를 두고 해석이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 가장 단순한 쪽은 금판을 근거로 선화공주를 지우는 견해다. 시주자가 사택적덕의 딸로 적힌 이상 미륵사를 세운 사람은 선화공주가 아니며, 선화공주는 실존 인물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둘을 함께 살려 두는 견해도 있다. 《삼국사기》 무왕 39년(638) 봄 3월 기사는 왕이 빈(嬪)과 더불어 큰 못에 배를 띄우고 놀았다고 적는다. 무왕에게 여러 비빈이 있었다면 사택왕후 말고 선화공주도 그중 한 사람이었을 수 있다고 본다. 발굴에서 세 구역이 서로 다른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나타났고, 사리공에서 함께 나온 다른 금판에는 ‘중부 덕솔 지수’처럼 소속 부와 관등을 붙인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를 근거로 여러 세력이 함께 절을 지었다고 보기도 한다.
완성 시점을 구역별로 나눠 보는 연구도 있다. 최연식은 《삼국사기》 무왕 35년(634) 봄 2월의 ‘왕흥사가 완성되었다’에 나오는 절 이름을 미륵사의 다른 이름으로 보고, 634년에는 가운데 구역이, 639년에는 서탑이 완성되었으며 동쪽 구역은 640년 이후였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다만 같은 기사는 그 절이 강가에 있어 왕이 배를 타고 드나들었다고 적고, 2007년 부여 왕흥사지에서는 577년 창건을 알려 주는 사리기가 나왔다. 어느 절이 완성되었다는 말인지부터 해석이 갈린다.
발견 10여 년 뒤 그간의 문헌사 연구를 정리한 박현숙은 미륵사 창건과 금판의 발원자를 떼어 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금판이 미륵사의 모든 것을 대변하지는 못하니, 절을 먼저 조성한 뒤 639년 정월 29일에 서탑에 사리를 봉영하는 행사를 열었다고 볼 수 있다는 설명이다. 결국 금판의 ‘가람을 세우고’가 절 전체를 말하는지, 서탑 구역의 일을 말하는지에 따라 왕후의 자리도 달라진다.
금판 곁에 새겨진 다른 이름들
사리공 안에는 이름이 새겨진 물건이 더 있었다. 청동합 여섯 점 가운데 하나에는 백제 2품 ‘달솔 목근(達率目近)’이 새겨져 있고, 다른 금판에는 ‘중부 덕솔 지수’ 같은 이름이 남았다. 공양품을 낸 관리들은 자기 이름을 그릇과 금판에 새겼는데, 가람을 세웠다는 왕후는 아버지 이름 뒤에 붙은 ‘女’ 한 글자로 남았다.
금판을 봉영하고 2년 뒤인 641년에 무왕이 세상을 떠났다. 이듬해 신라의 김춘추는 백제를 칠 군사를 청하러 고구려로 갔다. 639년 정월에 닫힌 서탑의 사리공은 1,370년 뒤인 2009년 1월에야 다시 열렸다. 그 안에서 나온 사리장엄구는 2022년 12월 27일 국보가 되었고, 지정 목록 9점의 맨 앞에 이 금판이 있다.
참고 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사료로 본 한국사》 「익산 미륵사지 출토 금제탑지문」(국역·원문·해설), 「왕흥사지 사리기 명문」, 「무령왕릉지석」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삼국유사》 권2 기이 「무왕」, 《삼국사기》 권27 백제본기 무왕 35년·39년(주석에 최연식, 「彌勒寺 創建의 歷史的 背景」, 《한국사연구》 159, 2012 소개)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장엄구」, 「익산 미륵사지 석탑」
박현숙, 「익산 미륵사지 출토 〈금제사리봉영기〉 연구의 쟁점과 과제」, 《한국고대사연구》 106,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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