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춧돌과 섬돌이 밭이랑 사이에 박혀 있었다. 조선 전기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이 경주 천주사 북쪽, 안압지라는 못의 서쪽 밭을 두고 적은 모습이다. 지리지는 그 돌들을 신라 임해전 터의 흔적으로 보았다. 못의 내력도 짧게 붙였다. 문무왕이 궁궐 안에 못을 파고 무산(巫山) 열두 봉우리를 본떠 돌로 산을 쌓았으며, 화초를 심고 진기한 새들을 길렀다고 한다.
지금 이 자리의 공식 이름은 ‘경주 동궁과 월지’다. 2011년 사적 이름이 ‘경주임해전지’에서 이렇게 바뀌었다. 이름에는 연못과 동궁이 나란히 들어 있지만 《삼국사기》에 기록된 연도는 서로 다르다. 궁궐 안에 못을 팠다는 기사는 문무왕 14년(674) 2월, 동궁을 지었다는 기사는 문무왕 19년(679) 8월이다. 못을 팔 때 신라는 당과 싸우고 있었고, 동궁을 지을 무렵에는 그 전쟁이 끝나 있었다.
당이 군사를 일으킨 다음 달
674년 정월, 당 고종은 크게 화를 냈다. 신라가 고구려의 배반한 무리를 받아들이고 백제의 옛 땅까지 차지해 사람을 두어 지키게 했다는 이유였다. 고종은 조서를 내려 문무왕의 관작을 빼앗고, 당의 서울에 머물던 왕의 동생 김인문을 신라왕으로 세워 돌려보내게 했다. 유인궤를 계림도대총관으로 삼아 군사도 일으켰다.
두 형제의 아버지는 642년 고구려에 군사를 청하러 갔던 김춘추다. 11년 전인 663년에는 당이 신라를 계림대도독부로 삼고 문무왕에게 계림주대도독이라는 직함을 붙였다. 그 직함을 준 쪽이 이제 왕의 관작을 거두고 동생을 대신 앉히겠다고 나섰다.
《삼국사기》 권7은 바로 다음 기사에 이렇게 적었다. “2월에 궁궐 안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진기한 새와 기이한 짐승을 길렀다.” 원문으로는 ‘宫内穿池造山, 種花草, 養珍禽竒獸’ 열네 글자다. 일을 맡은 사람도, 공사에 걸린 날수도, 왕이 이 일을 시킨 까닭도 적혀 있지 않다.
전쟁 한가운데서 정원을 꾸민 일을 두고는 풀이가 갈린다. 당의 사정을 짐작하고 있었기에 여유를 부릴 수 있었다는 자신감의 표현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용과 신선을 믿는 마음에 나라를 지키려는 바람을 담은 사업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뒤의 견해는 이 못을 큰 전쟁을 앞둔 신라의 긴장이 낳은 결과로 읽는다. 백제의 궁남지를 참고해 만들었다고 본 학자도 있다. 모두 기사 바깥에서 나온 해석이다.
이 못을 소개할 때 흔히 따라붙는 ‘열두 봉우리’와 ‘세 섬’도 674년 기사에는 없다. 열두 봉우리는 앞에서 본 조선 지리지의 설명이다. 세 섬은 1970년대 발굴에서 모습이 확인된 연못 속 섬으로, 크기가 저마다 다르다. 이 섬들을 바다 가운데 신선이 산다는 봉래·방장·영주에 견주는 풀이는 나중에 붙었다. 국가유산청의 유산 설명에도 674년에 세 섬과 열두 봉우리를 만들었다고 ‘전해진다’는 문장이 있다. 이 한 문장에 《삼국사기》와 조선 지리지, 발굴 결과가 섞여 있다.

전쟁이 끝난 679년의 공사들
문무왕 19년(679)에는 큰 공사가 잇따랐다. 2월에는 궁궐을 다시 고쳤는데 자못 웅장하고 화려했다고 한다. 8월 기사는 더 빽빽하다. 태백성이 달의 자리에 들어갔고 각간 천존이 죽었다. 동궁을 지었고 사천왕사가 완성되었으며 남산성을 늘려 쌓았다. 한 달 치 기록에 새 궁과 절과 산성이 함께 들어 있다.
동궁 기사는 한 줄이다. “동궁(東宮)을 짓고 처음으로 궁궐 안팎 여러 문의 이름을 정하였다.” 원문은 ‘創造東宫, 始定内外諸門額號’로, ‘창조(創造)’는 없던 것을 처음 만든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태자가 머물 곳이 이때 처음 생겼다고 읽기는 어렵다. 신라는 그 전부터 태자를 두었다. 이 때문에 태자를 위한 독립된 건물인 동궁이 이때 월지 곁에 처음 섰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기사는 새로 정한 문 이름을 하나도 적지 않았다. 다른 기록에서 임해문, 인화문, 무평문, 현덕문, 귀정문, 준례문 같은 이름이 보이고, 월지에서 나온 목간에는 개의문 같은 이름이 남아 있다. 이 가운데 어느 문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대부분 짚기 어렵다.
땅속에서 나온 글씨가 이 해와 맞물린다. 이 일대에서는 ‘의봉 4년(儀鳳四年)’이라 새긴 기와가, 임해전 터에서는 ‘조로 2년(調露二年)’이라 새긴 보상화무늬 벽돌이 나왔다. 의봉과 조로는 당의 연호로, 의봉 4년은 동궁을 지은 679년이고 조로 2년은 그 이듬해인 680년이다. 그래서 두 유물은 이곳 건물들이 문무왕 때 지어졌다는 근거로 꼽힌다. 기와의 ‘의봉 4년’ 뒤에 붙은 ‘개토(皆土)’ 두 글자의 뜻을 두고는 풀이가 갈린다. 삼국 통일을 가리킨다는 풀이도 있고 토목 공사와 관련된 말이라는 풀이도 있다.
안압지와 월지, 같은 못의 두 이름
《삼국사기》에는 ‘안압지’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이 이름은 조선 지리지에서 보인다. 기러기 안(雁)과 오리 압(鴨)을 쓴 이름이어서, 폐허가 된 못에 갈대가 우거지고 기러기와 오리만 날아들자 붙은 이름이라는 설명이 널리 퍼져 있다. 그럴듯하지만 이름 글자에서 짐작한 유래다.

‘월지’는 신라 기록에서 찾은 이름이다. 헌덕왕 14년(822) 정월, 왕위를 이을 아들이 없던 헌덕왕은 같은 어머니에게서 난 동생 수종을 부군으로 삼아 월지궁에 들게 했다. 수종은 뒷날의 흥덕왕이다. 《삼국사기》 직관지에는 월지전이라는 관청 이름도 있다. 여기에 못에서 나온 ‘동궁아일(東宮衙鎰)’명 자물쇠, ‘세택(洗宅)’이라 쓴 토기와 목간 같은 유물을 더해, 신라 사람들이 이 못을 월지라 불렀고 그 곁에 동궁이 있었다는 견해가 오랫동안 널리 받아들여졌다. 2011년에 바뀐 사적 이름도 이 견해를 따른다.
이름이 바뀌었다고 논쟁이 끝난 것은 아니다. 월지는 이 못이 아니라 월성 북쪽의 해자를 가리킨다는 연구가 있다. 그 주장까지는 따르지 않으면서도 월지궁과 동궁을 서로 다른 공간으로 구분하고, 태자가 지내며 정무를 보던 동궁이 월지 동쪽에 있었다고 보는 연구도 나왔다. 동궁이 태자의 공간이면서 임해전과 만수방 같은 왕의 공간까지 품은 곳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국립경주박물관 남쪽 부지에서 ‘동궁아(東宮衙)’라 쓴 토기가 나오자 동궁의 범위를 그곳까지 넓혀 보자는 주장이 나왔다. 같은 부지에서 ‘남궁지인(南宮之印)’이라 새긴 기와가 나왔으니 그곳은 남궁 자리였다는 반론이 뒤따랐다.
1980년에 다시 세운 누각 세 채
지금 못가에 서 있는 누각 세 채는 신라 때 건물이 아니다. 조선 사람들이 밭이랑 사이에서 보았다는 돌도 줄곧 제자리에 있지는 않았다. 《동경잡기》에는 1669년 경주를 다스리던 민주면이 유생들과 의논해 임해전 옛터의 계단돌을 가져다 경주 향교 대성전 아래에 두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철도가 지나가면서 이 터가 많이 훼손되었다.
1974년 못을 준설하다 바닥에서 유물이 쏟아져 나오자 작업을 멈췄다. 1975년 3월부터 1976년 12월까지 발굴했다. 돌로 쌓은 호안과 물이 드나드는 수로·입수구·배수구, 세 섬, 서쪽 못가의 건물터와 행랑터가 이때 드러났다. 바닥에서는 목간과 금동 판불, 나무배, 주사위 같은 유물이 나왔다. 국립경주박물관 월지관이 이곳과 주변 건물터에서 나온 유물을 모아 보여 준다.

복원은 그 뒤에 이루어졌다. 1977~1978년에 호안 석축을 다시 쌓았고, 1979~1980년에 목조 누각 세 채를 세웠다. 서쪽 못가에서 확인된 건물터 다섯 곳 가운데 세 곳에 지었으며, 발굴 때 나온 목조 건물 부재와 다른 신라 유적을 참고했다. 나머지 건물터는 주춧돌만 가지런히 드러내 자리를 짐작하게 했다. 못의 윤곽과 건물 자리는 발굴 결과를 따랐지만, 누각의 생김새에는 복원할 때의 추정이 들어가 있다.
임해전에서 열린 잔치
《삼국사기》에서 임해전은 잔치 자리로 자주 나온다. 효소왕 6년(697) 9월과 혜공왕 5년(769) 3월에 왕이 이곳에서 여러 신하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애장왕 5년(804)에는 임해전을 고치고 동궁 만수방을 새로 지었으며, 문성왕 9년(847)과 경문왕 7년(867)에도 임해전을 고쳤다. 소성왕 2년(800) 4월에는 폭풍에 임해문과 인화문이 무너졌다.
‘임해(臨海)’는 바다에 닿아 있다는 뜻이다. 경주 시내에서 바다에 견줄 만한 신라 못으로는 이곳 말고 꼽을 데가 없고, 조선 지리지는 안압지 서쪽을 임해전 터로 적었다. 이 때문에 일반적으로 못 서쪽의 건물지를 임해전 자리로 본다. 다만 그 건물지 가운데 어느 건물이 임해전이었는지, 남북으로 놓인 세 건물을 묶어 임해전이라 불렀는지는 의견이 갈린다.
헌안왕 4년(860) 9월의 모임에는 열다섯 살 왕족 응렴이 앉아 있었다. 왕이 그동안 배우러 다니며 본받을 만한 사람을 보았느냐고 묻자, 응렴은 세 사람을 들었다. 귀한 집 자제이면서 남의 아래에 서는 사람, 재산이 많아도 삼베와 모시옷으로 만족하는 사람, 권세가 있어도 남을 누르지 않는 사람이었다. 왕은 왕후에게 응렴만 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고 귓속말을 하고는 딸을 시집보내겠다고 했다. 응렴은 이듬해 왕위에 올랐다. 경문왕이다.
헌강왕 7년(881) 3월의 잔치에서는 술이 무르익자 왕이 거문고를 탔다. 좌우는 저마다 노래와 시를 지어 올리며 마음껏 즐기다 자리를 마쳤다.
임해전은 《삼국사기》의 경순왕 5년(931) 2월 기사에 마지막으로 나온다. 고려 태조가 기병 50여 명을 거느리고 와서 만나기를 청하자, 경순왕은 백관과 함께 교외에서 맞아 궁으로 들이고 임해전에서 잔치를 열었다. 잔치가 무르익자 경순왕은 하늘의 도움을 받지 못해 점점 화란에 이르렀고 견훤이 나라를 멸망시키려 한다며 눈물을 흘렸다. 좌우에 있던 이들은 모두 목메어 울었고, 태조도 눈물을 흘리며 위로했다. 문무왕이 궁궐 안에 못을 판 지 257년 뒤의 일이다.
참고 자료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삼국사기》 권7 신라본기 문무왕 14년 정월·14년 2월·19년 2월·19년 8월, 권8 효소왕 6년 9월, 권10 헌덕왕 14년 정월, 권11 헌안왕 4년 9월, 권12 경순왕 5년 2월, 권39 직관지 월지전(각 기사의 국역과 주석)
한국고전종합DB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주부 고적 조
국가유산청 국가유산 디지털 서비스 「경주 동궁과 월지」(설명과 연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경주 동궁과 월지」, 「안압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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