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점은 목화씨를 붓두껍에 숨겨 왔을까 — 실록의 주머니, 고려사의 덕흥군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가져온 목화씨는 열 개 남짓이었다. 그의 죽음을 기록한 《태조실록》 14권 태조 7년(1398) 6월 13일 졸기는, 원에서 돌아오려 할 무렵 길가의 목면 나무를 보고 씨 10여 개를 따서 주머니에 넣어 가져왔다고 전한다. 원문으로는 ‘盛囊以來’, 주머니에 담아 왔다는 네 글자다.

흔히 듣는 이야기 속 문익점은 원나라의 감시를 피해 목화씨를 붓두껍에 숨긴다. 이번에 읽은 조선 초의 두 기록에는 붓두껍도, 씨앗을 내가지 못하게 했다는 원나라의 금령도 나오지 않는다. 졸기는 주머니라고 했고, 1451년에 편찬된 《고려사》 열전은 씨앗을 무엇에 담아 왔는지 적지 않았다. 그 대신 《고려사》에는 졸기에 없는 한 줄이 있다. 그가 원에 머물며 덕흥군에게 붙었다가, 덕흥군이 패하자 돌아왔다는 것이다.

졸기가 따라간 씨앗의 길

졸기는 짧은 이력부터 적는다. 진주 강성현 사람 문익점은 공민왕 때인 경자년(1360)에 과거에 올라 김해부 사록이 되었고, 계묘년(1363)에 순유박사로서 좌정언에 올랐다. 그리고 계품사로 원나라에 가는 좌시중 이공수의 서장관이 되었다. 서장관은 사신단의 문서와 기록을 맡는 자리다. 길가의 목면 나무를 본 것은 이 사행에서 돌아오려던 때였다.

씨앗의 행방은 숫자로 이어진다. 갑진년(1364)에 진주에 닿은 문익점은 씨의 반을 같은 고을 사람 정천익에게 주어 심게 했다. 전객령 벼슬에서 물러나 있던 사람이다. 그 가운데 살아난 것은 한 개뿐이었다. 정천익이 그해 가을 거둔 씨는 백여 개였고, 해마다 더 심어 정미년(1367) 봄에는 종자를 마을에 나눠 주며 심어 기르기를 권했다.

졸기를 읽다가 내가 멈춘 곳은 그다음 문장이다. “익점 자신이 심은 것은 모두 꽃이 피지 아니하였다.” 나머지 반을 어떻게 했는지는 따로 적혀 있지 않지만, 문익점도 제 몫을 심었다는 뜻으로 읽힌다. 씨앗을 숨긴 장면은 없고, 씨앗을 나눈 장면이 있다.

《고려사》 열전이 먼저 꺼낸 덕흥군

《고려사》 권111 열전 문익점은 순서가 다르다. 고향과 급제, 정언 벼슬까지는 두 문장으로 지나간다. 바로 이어지는 문장이 “사신이 되어 원에 갔다가 그곳에 머물면서 덕흥군에게 붙었다가 덕흥군이 패하자 곧 돌아왔다”이다. 목면 종자를 얻어 돌아왔다는 말은 그 뒤에야 나온다. 열전은 귀국의 사정을 먼저 밝히고 씨앗을 나중에 적었다.

덕흥군은 원이 공민왕 대신 고려 왕으로 세운 인물이다. 같은 책 이공수 열전의 한 대목은 “원에서 공민왕을 폐하고 덕흥군을 세웠는데”라는 말로 시작한다. 원 조정이 고려 왕을 갈아 치우려 하던 때였다. 이자송 열전은 그 무렵 연경에 있던 고려 사람들이 어떻게 갈렸는지를 적는다. 황제가 고려 사람들을 모두 덕흥군을 따라 본국으로 가게 하자 김첨수·유인우·강지연·황순·안복종·문익점·기숙륜 등이 덕흥군에게 붙었다. 이자송과 홍순, 황대두는 몸을 숨기고 따르지 않았다. 돈과 양식이 떨어지도록 연경에 버틴 이들은 귀국한 뒤 왕에게서 쌀과 콩 30석씩을 받았다.

졸기에는 이 일이 한 글자도 없다. 서장관이 누구였는지도 두 책이 다르게 남겼다. 졸기는 문익점을 이공수의 서장관이라 했지만, 이공수 열전에서 이공수가 덕흥군을 따르느니 머리를 깎고 산에 들어가겠다고 털어놓는 상대는 “서장관 임박”이다. 한 사행에 서장관이 둘이었는지, 어느 한쪽이 다르게 적은 것인지는 이번에 읽은 기록만으로 가릴 수 없다.

널리 알려진 장면보다 열전의 짧은 한 줄이 더 오래 남는 일은 서희 열전의 끝부분을 읽을 때도 있었다. 서희 열전에서는 그 한 줄이 맨 끝에 있었고, 문익점 열전에서는 앞머리에 있다.

대나무 지팡이 속에 넣은 것

같은 이공수 열전에는 무언가를 몰래 숨겨 국경 너머로 보낸 장면이 실제로 있다. 덕흥군이 패배한 뒤의 기사다. 이공수는 홍순·허강·이자송·김유·황대두·장자온·임박 등과 함께 글을 써서 대나무 지팡이 속에 넣었다. 그러고는 하인 정량과 송원에게 남루한 옷을 입혀 거지처럼 꾸민 뒤 지름길로 보냈다. 글의 내용은 최유가 다시 대군을 일으키려 하니 덕흥군이 졌다고 안심하지 말고 대비하라는 것이었다.

숨긴 것은 씨앗이 아니라 편지였다. 이공수와 함께 이름이 오른 일곱 사람 가운데 문익점은 없다. 이 장면과 붓두껍 이야기가 이어져 있다는 근거는 찾지 못했고, 둘을 나란히 놓는 것은 내 읽기일 뿐이다. 이번에 읽은 범위에서 대롱 속에 무언가를 숨겨 보낸 기록은 이것 하나였다는 점만 적어 둔다.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의 「목화의 전래와 재배」 해설은 그가 ‘붓 뚜껑에 목화씨를 몰래 가져 왔다’는 이야기를 훗날 만들어진 허구 섞인 이야기로 본다. 해설 끝에는 이 내용이 집필자 개인의 견해라는 안내가 붙어 있다. 그 이야기가 어느 책에서 처음 나왔는지는 이번에 확인하지 못했다. 널리 퍼진 이야기의 출발점을 거꾸로 짚는 방법은 소현세자 독살설이 실록 어디서 시작됐는지 따라간 글에서 썼던 것과 같지만, 붓두껍의 출발점은 이번에 읽은 기록 바깥에 있다.

대나무 지팡이를 짚고 산길 지름길을 걷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상상해 그린 한지 수채화

씨아와 물레는 누가 만들었나

씨앗이 진주에 뿌리내린 뒤의 이야기에서 두 기록은 또 갈린다. 졸기에 따르면 국역이 ‘중국의 중’으로 옮긴 승려 홍원이 정천익의 집에 왔다가 목면을 보고 울며 말했다. “오늘날 다시 본토의 물건을 볼 줄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정천익은 그를 며칠 머물게 하며 실 뽑고 베 짜는 법을 물었고, 홍원은 자세히 일러 준 뒤 기구까지 만들어 주었다. 정천익이 이를 집의 여종에게 가르쳐 베 한 필을 짜자, 이웃 마을이 서로 배워 한 고을에 퍼졌고 10년이 못 되어 온 나라에 퍼졌다고 졸기는 전한다.

《고려사》 열전에는 홍원이 나오지 않는다. 처음에는 기르는 법을 몰라 거의 말라 죽고 한 줄기만 남았는데 3년 만에 크게 불어났다고 한 뒤, 이렇게 맺는다. “취자차와 소사차는 모두 정천익이 만들었다.” 원문은 ‘皆天益創之’로, 처음 만들어 냈다는 뜻의 創 자를 썼다. 우리역사넷의 번역은 이 둘을 목화씨를 뽑는 씨아와 실을 뽑는 물레로 옮긴다.

정천익을 부르는 말도 다르다. 졸기는 같은 고을 사람이라고만 했고, 열전은 문익점의 舅라고 했다. 국역은 이 글자를 ‘장인’으로 옮겼다. 그래도 두 기록이 함께 가리키는 사실이 하나 있다. 살아남은 씨를 키운 것은 문익점이 아니라 정천익의 손이었다. 졸기는 여기에 첫 베를 짠 사람을 더한다. 정천익 집의 여종이다. 그 이름은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목화송이와 씨아, 물레가 놓인 늦가을 시골집 마당을 상상해 그린 한지 수채화

졸기에 없는 마지막 장면

졸기의 끝은 순탄하다. 목면이 퍼진 일이 알려지자 나라에서 을묘년(1375)에 문익점을 불러 전의주부로 삼았고, 벼슬이 여러 번 올라 좌사의대부에 이르렀다가 일흔에 세상을 떠났다. 조선에 들어와서는 의논하는 이들의 말에 따라 참지의정부사와 강성군 등으로 증직되었다. 아들은 중용·중실·중계 세 사람이다.

열전의 끝은 탄핵이다. 창왕이 즉위하자 문익점은 좌사의시학으로서 학문하는 도리를 논하는 글을 올렸다. 간관 이준 등이 사전을 되돌려 주어서는 안 된다고 다툴 때, 그는 이색·이림·우현보 편에 서서 병을 핑계로 서명하지 않았다. 다음 날 서연에 나가자 대사헌 조준이 탄핵했다. 경연에서 ‘예예’, ‘옳사옵니다’만 되풀이했고, 녹봉을 잃을까 걱정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문익점은 파직되었다. 열전이 적은 아들은 중용·중성·중실·중진·중계 다섯이다.

졸기에서 덕흥군과 탄핵이 왜 빠졌는지, 아들의 수는 왜 다른지 두 기록은 설명하지 않는다. 조준의 탄핵문은 문익점을 두고 본래 진주 구석에서 몸소 농사짓던 사람이라고 했다. 같은 사람의 졸기는 그가 손수 심은 목화가 모두 꽃을 피우지 못했다고 적어 두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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