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고는 아무나 곧바로 칠 수 있었을까 — 1401년 실록의 조건

신문고 이야기를 들으면 억울한 백성이 궁궐로 달려가 북을 치는 장면이 먼저 떠오른다. 그런데 1401년의 《태종실록》 태종 1년 8월 1일 기사를 읽으면 그 북까지 가는 길에 절차가 하나 놓여 있다. 의정부는 서울과 지방의 백성이 먼저 자기 고장의 관사에 억울함을 알렸는데도 그 관사가 처리하지 않을 때 북을 치게 하자고 건의했다. 신문고는 처음부터 모든 다툼을 건너뛰어 임금에게 곧바로 가져가는 통로로 설계된 것이 아니었다.

이 기사에는 이름의 변화도 함께 적혔다. 처음에 제안된 이름은 ‘등문고’였고, 조정은 의정부의 건의를 받아들인 뒤 ‘신문고’로 고쳤다. 이름만 기억하면 제도가 열렸다는 인상만 남지만, 상소문을 끝까지 읽으면 누가 조사하고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도 나온다. 문 앞에 북 하나를 세우는 일보다, 북소리를 접수한 뒤의 일이 더 길다.

먼저 고을 관사에 말해야 했다

의정부가 제시한 순서는 뚜렷하다. 억울한 일을 안고 있는 사람이 소재지 관사에 고한다. 관사가 그 일을 다스려 주지 않는 경우에 한해 나와서 등문고를 칠 수 있다. 따라서 ‘백성이 북을 칠 수 있었다’는 말은 맞지만, ‘아무 일이나 첫 단계부터 궁궐의 북으로 가져갈 수 있었다’는 말은 이 건의와 다르다. 서울과 지방을 함께 언급했다는 점도 눈에 띈다. 다만 지방 사람이 실제로 서울까지 오기 위해 어떤 비용과 시간을 들였는지는 이 한 기사에 나오지 않는다.

조선 초기 지방 관아의 닫힌 문과 빈 소원지를 상상해 그린 한지 수채화

‘고을에서 풀리지 않은 일’이라는 조건은 두 방향으로 읽힌다. 담당 관사가 억울함을 외면했을 때 다른 길을 열어 준다는 뜻이 있다. 동시에 관사의 문턱을 아예 넘지 못한 사람에게는 처음부터 북이 가깝지 않았을 수도 있다. 앞의 문장은 기록의 내용이고, 뒤의 문장은 그 절차를 읽고 떠올린 가능성이다. 이 기사만으로 누구나 실제로 북 앞에 설 수 있었는지를 확인할 수는 없다.

북을 치면 누가 판단했을까

신문고를 ‘임금에게 직접 말하는 북’이라고 설명할 때 빠지기 쉬운 대목이 있다. 의정부의 건의는 북으로 올라온 일을 헌사로 하여금 추궁해 밝히고, 다시 아뢰어 처결하게 하자고 했다. 소리 한 번에 판결이 내려지는 방식은 아니었다. 조사의 책임을 맡을 관청을 지정하고 그 결과를 보고하게 하는 절차가 상소 안에 들어 있다. 백성의 말이 접수된 뒤에도 사실을 가리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건의는 억울함을 펴는 사람만 적지 않았다. 사사로운 원망 때문에 남을 무고하는 사람에게는 반좌율을 적용하자고도 했다. 상대를 거짓으로 고발했을 때 그 죄에 맞는 벌을 고발자에게 돌리는 장치다. 이 조항을 두고 신문고가 백성을 겁주기 위한 제도였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북을 친 사람의 말을 곧바로 진실로 받아들이겠다는 약속도 아니었음을 보여 준다. 접수, 조사, 처결, 무고에 대한 책임이 한 문서에 함께 적혀 있다.

조선 초기 궁궐 문 밖의 북을 상상해 그린 한지 수채화

같은 해 11월 16일 기사는 신문고가 마침 만들어졌다고 적는다. 여기서 하윤은 지방 사람이 먼저 수령에게 호소하고, 해결되지 않으면 관찰사, 다시 헌부를 거친 뒤에 북을 쳐야 한다고 설명했다. 8월 의정부 건의보다 경유할 관청이 구체적으로 열거된 셈이다. 이무는 무고로 치는 사람이 생길 수 있다고 걱정했고, 하윤은 사실이면 들어주고 허위이면 죄를 주겠다고 답했다. 북을 두고 벌인 대화의 중심도 여전히 ‘어떻게 거르고 조사하느냐’에 있었다.

8월 기사는 허용 절차와 명칭을 기록했고, 11월 기사는 북이 만들어진 사실과 추가적인 경유 절차를 전한다. 두 날짜를 하나로 뭉쳐 ‘8월 1일에 북이 세워졌다’고 쓰기보다, 8월에 제안을 받아들였고 11월 기사에서 완성을 확인한다고 나누어 읽는 편이 기록에 가깝다. 8월부터 11월까지의 제작·배치 과정을 이 두 기사만으로 복원할 수는 없다.

1771년의 북은 같은 규칙이었을까

몇 세기 뒤 기록은 다른 모습을 보여 준다. 《영조실록》 영조 47년(1771) 11월 23일 기사에서 영조는 옛 법에 따라 신문고를 다시 설치하도록 했다. 이때는 북을 칠 수 있는 일을 네 가지로 한정하고, 허용되지 않은 일로 치면 벌을 주겠다고 명했다. 이 네 가지 사유는 1771년 재설치 기사의 내용이다. 이를 1401년 의정부 상소에 그대로 옮겨 놓으면 두 시기의 규칙이 뒤섞인다.

‘다시 설치’했다는 표현은 그 사이 운영에 변화가 있었음을 알려 준다. 다만 어느 해에 몇 차례 멈추고 재개됐는지까지 이 기사 하나가 다 설명해 주지는 않는다. 신문고를 조선 500년 동안 똑같이 열린 민원 창구였다고 말하기 어려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같은 이름의 북이라도 사람들이 다가갈 수 있는 조건은 시기에 따라 달랐다. 1401년의 관사 경유 규칙과 1771년의 허용 사유 제한은 서로 다른 질문에 답하는 기록이다.

신문고가 남긴 가장 흥미로운 장면은 북을 치는 순간보다 그 전후에 있다. 관사가 억울함을 외면하면 어떤 길이 남는가. 그 길로 들어온 호소는 누가 조사하는가. 《태종실록》은 이 두 질문을 한 상소문에 담았다. 백성의 목소리를 들으려는 제도를 말하려면, 문이 열려 있었다는 선언과 그 문까지 가는 실제 규칙을 함께 읽어야 한다.

조선의 기록에서 제도의 이름과 실제 절차 사이를 더 읽고 싶다면 반민특위의 법이 바뀐 단계와 훈민정음 창제와 책 완성을 가르는 기사도 참고할 만하다.

참고 자료
《태종실록》 2권, 태종 1년(1401) 8월 1일, 등문고 건의와 신문고 개칭
《태종실록》 2권, 태종 1년(1401) 11월 16일, 신문고 설치
《영조실록》 117권, 영조 47년(1771) 11월 23일, 신문고 재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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