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이름의 유래, 1400년 태상왕의 궁에 먼저 붙었던 ‘덕수’

왕위에서 물러난 지 세 해째인 정종 2년(1400) 6월 1일, 태상왕 이성계가 머물던 궁에 이름이 붙었다. 이날 세자가 태상전에 나아가 부(府)를 다시 세우자고 청했지만, 태상왕은 썩 달가워하지 않았다. 지난 3년 동안 부가 없어도 옷과 음식이 모자란 적이 없었는데, 이제 와서 세워 봐야 무슨 보탬이 되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날 태상왕의 궁은 덕수궁(德壽宮)이 되었고, 궁을 받드는 관청인 승녕부(承寧府)도 세워졌다. 새로 임명된 관원들이 인사를 올리자 태상왕의 노여움이 조금 풀렸다고 《정종실록》은 적었다.

507년 뒤인 1907년 8월 2일(양력), 대한제국 궁내부 대신 이윤용이 순종에게 아뢴 두 이름도 덕수와 승녕이었다. 두 주 전 황제 자리에서 물러난 고종, 곧 태황제의 궁 이름을 덕수로, 그 궁에 딸린 부의 이름을 승녕으로 의논해 정했다는 보고였다. 순종은 이를 그대로 윤허했다. 경운궁이 덕수궁으로 불리게 된 일을 실록에서 찾으면 이 짧은 기사에 닿는다. 그런데 기사 어디에도 ‘경운궁’이라는 말은 없다.

물러난 임금들의 궁에 붙던 이름

조선 초에는 살아서 왕위를 물려준 임금이 셋이나 있었다. 태조가 정종에게, 정종이 태종에게, 태종이 세종에게 자리를 넘겼다. 세종 즉위년(1418) 11월 3일에는 상왕 태종을 위해 짓던 새 궁이 완성되어 수강궁(壽康宮)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상왕이 되었다고 한가하게만 지낸 것은 아니어서, 이듬해 대마도 출병을 알리는 교유를 내린 것도 태종이었다.

1907년 8월 12일, 내각은 의논 끝에 태황제에게 올릴 존호를 ‘수강’ 두 글자로 정했다. 열흘 사이에 조선 초에 물러난 두 임금의 궁 이름이 차례로 고종에게 붙은 셈이다. 궁내부와 내각이 이 선례를 어떻게 검토했는지는 기사에 남아 있지 않다. 다만 8월 27일 순종이 즉위하며 반포한 조서는 조선 초의 세 차례 양위를 하나하나 짚는다.

물러난 임금이 머무는 궁의 빈 방석과 소나무 병풍을 상상해 그린 한지 수채화

‘대리’로 시작해 ‘선위’로 적힌 7월

고종이 7월 18일 내린 조령은 황태자에게 군국의 큰일을 대리하게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튿날 반포한 조문은 숙종·영조·순조가 늘그막에 세자에게 정사를 대리시킨 예를 들었다. 대리를 축하하는 진하는 임금이 참석하지 않고 의식만 치르는 권정례로 진행했다.

《순종실록》은 같은 7월 19일의 일을 ‘承命代理聽政, 仍受禪’ 한 줄로 정리한다. 명을 받들어 대리청정을 했고, 이어 선위를 받았다는 뜻이다. 대리로 시작한 일이 같은 날 황위를 넘겨받은 일로 기록되었다. 이틀 뒤인 7월 21일 기사에는 벌써 태황제를 받들 존봉도감을 두라는 명이 나온다.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은 일제강점기인 1927년부터 1935년까지 이왕직 주관으로 편찬되었다. 원고마다 경성제국대학 교수의 감수를 거쳤고, 일본인 이왕직 장관의 결재를 받아 간행되었다. 이런 편찬 과정 때문에 다른 실록보다 한 번 더 따져 읽어야 한다는 평가가 따른다.

이름은 8월에 정했지만

8월 2일 기사가 정한 것은 ‘태황제의 궁’이라는 이름이었다. 궁궐은 그 뒤에도 한동안 경운궁으로 불렸다. 8월 14일 순종은 경운궁으로 옮길 테니 궁내부가 서둘러 수리하라는 조령을 내렸다. 27일에는 경운궁 안의 서양식 건물 돈덕전에서 즉위식을 올렸다. 9월 17일 기사도 순종이 ‘경운궁의 즉조당’으로 거처를 옮겼다고 적는다.

11월 13일 순종은 황후, 황태자와 함께 창덕궁으로 옮겼다. 바로 다음 날 나온 조령이 눈길을 끈다. 태황제의 하교를 받들어 덕수궁을 안국동에 영건하라는 것이다. 이 조령대로라면 덕수궁은 어느 한 터의 이름이라기보다 태황제가 머무는 궁을 부르는 이름이었고, 새로 지어 옮겨 갈 수도 있었다.

궁궐 담장을 따라 다른 궁으로 옮겨 가는 가마 행렬을 상상해 그린 한지 수채화

그 뒤 안국동 공사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실록에 나오지 않는다. 일주일 뒤인 11월 21일에는 황태자가 덕수궁에 문안했다고 적혀 있다. 이듬해부터는 순종이 문안하러 가는 곳도 덕수궁으로 기록된다. 1909년 7월 9일에는 태황제가 함녕전에 나와 이토 히로부미에게 식사를 내렸다는 기사가 있다. 고종이 옛 경운궁 자리에 그대로 머물렀다는 뜻이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세상을 떠난 곳도 덕수궁 함녕전이었다. 물러난 황제의 궁을 가리키던 이름이 그가 끝까지 머문 자리의 이름으로 남았다.

정릉동 행궁이 경운궁이 되기까지

이 자리가 궁이 된 것은 임진왜란 때다. 선조 26년(1593) 10월 1일, 벽제역을 떠난 선조는 저녁에 정릉동의 행궁으로 들어갔다. 성종의 형 월산대군 집안의 집이었고, 근처 계림군과 심의겸의 집까지 궁으로 썼다.

광해군 3년(1611) 10월 11일, 이 행궁은 경운궁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광해군일기》 중초본에는 처음에 흥경궁으로 하려다가 광해군이 “전대의 궁호이니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며 다른 이름을 여럿 써 올리게 한 대목이 남아 있다. 정초본에서는 이 대목이 빠지고, 이름을 고쳤다는 한 줄의 기록만 남았다. 1611년에는 앞 시대의 궁호라는 이유로 물린 이름이 있었고, 1907년에는 조선 초의 궁호가 다시 쓰였다.

경운궁은 광해군 때 정식 궁궐이 되었다가 창덕궁이 중건되면서 별궁으로 남았다. 1618년에는 인목대비를 이곳에 가두고 서궁이라 낮춰 불렀다. 1623년 인조반정 뒤 인조는 즉조당과 석어당만 남기고 나머지 건물을 옛 주인에게 돌려주거나 없앴다. 즉조당은 광해군과 인조가 즉위한 건물이다.

1897년부터는 다시 궁궐다운 모습을 갖추었다. 그해 2월 20일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돌아왔고, 10월에는 국호를 ‘대한’으로 정하고 황제 자리에 올랐다. 1904년 4월 14일 밤에는 수리 중이던 함녕전에서 난 불이 번져 중화전, 즉조당, 석어당과 여러 전각이 모두 탔다.

2011년 공청회에 오른 두 이름

경운궁이라는 이름을 되찾자는 주장은 2011년 문화재청의 공식 검토로 이어졌다. 그해 7월 사적 439건의 지정 명칭을 바꿀 때 덕수궁만은 결론을 내지 못했다. 9월에는 시민 설문 계획을 내놓았고, 12월 2일 국립고궁박물관에 유지와 환원 양쪽의 발제를 듣는 공청회를 마련했다.

문화재청이 정리한 양쪽 입장은 이랬다. 한쪽은 100년 넘게 써서 이미 자리 잡은 이름을 바꾸면 사회적·경제적 비용과 혼란이 크다는 입장이었다. 다른 쪽은 경운궁이 대한제국 황실의 법궁 이름이었고 덕수궁은 일제의 압력으로 물러난 황제의 거처라는 뜻을 담았으니 원래 이름으로 돌려야 한다고 보았다. 국가유산청의 사적 설명은 같은 덕수를 고종의 장수를 비는 뜻으로 풀이한다.

1400년에도 1907년에도 이 이름을 받은 곳은 물러난 임금의 궁이었다. 오래 살기를 비는 글자와 물러난 임금의 거처라는 쓰임이 1400년부터 한 이름에 겹쳐 있었던 셈이다. 그 뒤로도 사적의 이름은 덕수궁 그대로다.

지금 덕수궁에서 찾아볼 자리

정문 대한문도 처음 모습과는 다르다. 원래 정문은 남쪽의 인화문이었고, 동쪽 문이던 대안문을 1906년 4월 수리하면서 이름을 대한문으로 바꿔 정문으로 삼았다. 그 뒤 도로 공사와 도시계획 때문에 1914년과 1970년 두 차례 안쪽으로 옮겨졌다.

중화문 안쪽의 중화전은 1902년 지붕이 두 겹인 중층 건물로 지었다가, 1904년 불탄 뒤 1906년 단층으로 줄여 다시 세웠다. 바로 뒤의 즉조당은 대한제국 초기에 정전으로 쓰이면서 태극전, 중화전이라는 이름을 차례로 달았다. 1907년 9월부터 11월까지는 순종이 머물렀다. 옆에 있는 2층 건물 석어당과 함께 1904년 화재 뒤 다시 지은 건물이다.

고종이 물러난 뒤 지낸 침전인 함녕전은 1904년 화재 뒤 그해 12월에 다시 지었다. 순종이 즉위식을 올린 돈덕전은 1902~1903년 외국 손님을 맞으려 지은 서양식 영빈관이었다. 1921~1926년 헐렸다가 2023년 9월 다시 지어 문을 열었다. 1910년 완공된 석조전에서는 광복 뒤 1946~1947년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다.

1905년 즉조당을 다시 지은 뒤 고종은 직접 쓴 현판 셋을 걸었다. 경운궁, 즉조당, 석어당 현판이었다. 궁 이름이 바뀌기 두 해 전에 걸린 ‘경운궁’ 현판은 지금 국립고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참고 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정종실록》 4권 정종 2년(1400) 6월 1일 1번째 기사, 《세종실록》 2권 세종 즉위년(1418) 11월 3일 4번째 기사, 《선조실록》 43권 선조 26년(1593) 10월 1일 2번째 기사, 《광해군일기》 중초본·정초본 46권 광해군 3년(1611) 10월 11일 1번째 기사

《고종실록》 35권 1897년 2월 20일 1번째 기사, 44권 1904년 4월 14일 1번째·15일 5번째 기사, 48권 1907년 7월 18일 1번째·19일 3번째 기사

《순종실록》 1권 1907년 7월 19일·7월 21일·8월 2일·8월 12일·8월 14일·8월 27일·9월 17일·11월 13일·11월 14일·11월 21일 기사, 3권 1909년 7월 9일 2번째 기사, 《순종실록부록》 10권 1919년 1월 21일 2번째 기사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사적 「덕수궁」, 보물 「덕수궁 중화전 및 중화문」, 「덕수궁 함녕전」. 궁능유적본부 「덕수궁 소개·역사」

문화재청 보도자료 「덕수궁이냐 경운궁이냐」(2011년 9월 15일), 「‘경운궁이냐, 덕수궁이냐’」(2011년 11월 30일), 「100년 만에 다시 열리는 대한제국의 영빈관 ‘덕수궁 돈덕전’」(2023년 9월 25일). 국립고궁박물관 소장품 「경운궁 현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덕수궁」, 「덕수궁 대한문」, 「덕수궁 즉조당」, 「순종실록」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