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붙인 《삼강행실》에 가르칠 사람까지 정한 1434년 교서

세종 16년(1434) 4월 27일, 세종은 《삼강행실》을 판에 새겨 서울과 지방에 널리 펴고 학식 있는 사람을 골라 늘 가르치게 하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도승지 안숭선 등이 지당하다고 답하자 중추원사 윤회에게 교서를 짓게 했다. 《세종실록》 64권에 실린 그날 기사의 교서에는 그림을 붙였다는 대목에 이어 이런 단서가 따라온다. ‘다만 백성들이 문자를 알지 못하여 책을 비록 나누어 주었을지라도, 남이 가르쳐 주지 아니하면 역시 어찌 그 뜻을 알아서 감동하고 착한 마음을 일으킬 수 있으리오.’

《삼강행실》은 흔히 글 모르는 백성도 알아보게 그림을 넣은 책으로 소개된다. 그런데 이 책을 두고 실록에 남은 문장을 날짜순으로 놓으면, 백성이 책의 뜻을 어떻게 알게 될지에 대한 생각이 한 번에 정해지지 않았다는 점이 보인다. 읽고 외우게 하자는 건의, 그림을 보면 느낄 것이라는 기대, 가르칠 사람을 두라는 교서, 언문으로 옮기자는 하교가 차례로 나온다.

진주 김화의 일 뒤에 나온 《효행록》 증보 명령

이 책의 출발점으로 흔히 꼽히는 일은 세종 10년(1428)에 있었다. 그해 9월 27일 형조는 진주 사람 김화가 아비를 죽였으니 율에 따라 능지처사해야 한다고 아뢰었고, 세종은 그대로 따른 뒤 ‘이는 반드시 내가 덕이 없는 까닭’이라고 탄식했다. 10월 3일 경연 기사는 세종이 이 일을 듣고 낯빛이 변해 스스로를 탓하고, 신하들을 불러 효제를 돈독히 할 방책을 의논하게 했다고 전한다.

판부사 변계량은 《효행록》 같은 책을 널리 반포해 골목의 백성이 늘 읽고 외우게 하자고 했다. 세종은 직제학 설순에게 옛 24인의 효행에 20여 인을 더하고 고려와 삼국의 효자도 모아 한 책으로 엮되 집현전이 맡으라고 일렀다.

이때 명한 것은 《효행록》 증보였고 삼강이라는 이름은 아직 없다. 1432년에 완성된 책의 서문에도 김화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두 일을 잇는 실마리는 서문 쪽에 있다. 완성된 책의 효자 부분이 《효행록》에 실린 이제현의 찬을 가져다 썼다는 대목이다.

그림을 보면 느낄 것이라 쓴 1432년 서문과 1433년 발문

세종 14년(1432) 6월 9일 집현전이 새로 편찬한 《삼강행실》을 올렸다. 권채가 지은 서문은 선덕 신해년, 곧 1431년 여름에 세종이 가까운 신하에게 한 말을 옮겨 놓았다. 뛰어난 행실을 골라 그림과 찬을 만들어 중외에 나누어 주면 어리석은 남녀가 다 쉽게 보고 느껴 분발할 것이라는 내용이다. 편찬은 집현전 부제학 설순이 맡았다.

서문에 따르면 중국에서 우리나라까지 책에 실린 이야기를 뒤져 효자·충신·열녀를 각각 110명씩 골랐고, 앞에는 그림을 그리고 뒤에는 사실을 적은 다음 시를 붙였다. 세종은 《삼강행실도》라는 이름을 내리고 주자소에 판에 새겨 길이 전하게 했다. 서문이 그린 독자는 어진 이와 어리석은 이, 귀한 이와 천한 이, 아이와 부녀를 가리지 않는다. 그들이 그림을 펼쳐 그 모습을 떠올리고 시를 읊어 그 마음을 본받으리라는 것이다.

이듬해 2월 24일 예문 대제학 정초가 지어 올린 발문은 판에 새기는 일이 끝났다고 적고, 그림의 힘을 더 또렷하게 말한다. 옛사람과 지금 사람은 서로 얼굴도 모르지만 ‘하물며 친히 그 모양을 보고 그 일을 영탄함이리오. 그 느낌이 반드시 깊고, 그 흥분이 반드시 빠를 것’이라고 했다.

서문의 ‘익히 듣는다’는 말 정도를 빼면, 두 글 어디에도 책 곁에서 뜻을 풀어 줄 사람을 정하라는 말은 없다.

1434년 4월 27일 기사에 나오는 세 목소리

이날의 기사는 짧은 문답과 긴 교서로 이뤄져 있다. 먼저 말한 사람은 세종이다. 삼강은 사람의 도리 가운데 큰 줄기라며, 유신에게 고금의 일을 엮고 그림을 붙이게 해 《삼강행실》이라 이름했다고 말한다. 이어 학식 있는 사람을 골라 늘 가르치고 이끌어 어리석은 백성이 모두 알게 하자고 제안한다. 안숭선 등의 답은 ‘성상의 하교가 지당하시옵니다’ 한마디였다.

가르칠 사람을 고르자는 생각은 이처럼 세종의 말에 먼저 나온다. 교서는 그 뒤 윤회에게 짓게 한 글로, ‘내가 생각건대’로 시작하는 왕의 1인칭 문장이다. 교서의 문장을 세종의 뜻으로 읽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글을 지은 사람은 윤회다.

교서는 신하와 아들과 아내가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일이 간혹 있다고 탄식한 뒤 편찬 경위를 말한다. 충신·효자·열녀 가운데 본받을 만한 사람을 뽑아 사실을 적고 시찬을 지었지만, 어리석은 백성이 쉽게 깨닫지 못할까 염려해 그림을 붙였다(付以圖形). 판에 새겨 널리 펴서 ‘거리에서 노는 아이들과 골목 안 여염집 부녀들’까지 쉽게 알기를 바란다는 문장이 이어지고, 곧바로 ‘다만’으로 시작하는 앞의 단서가 나온다. 원문은 이렇다.

第以民庶不識文字, 書雖頒降, 人不訓示, 則又安能知其義而興起乎?

같은 글 안에서 그림은 쉽게 알게 하는 장치로 소개되고, 몇 줄 뒤에는 그것만으로 뜻에 닿기 어렵다는 조건이 붙는다. 1432년 서문과 1433년 발문에는 없던 조건이다. 그렇다고 교서가 그림의 효과를 의심했다고까지 읽을 근거는 없다. 책을 나누어 주는 일과 뜻을 깨닫게 하는 일을 따로 떼어 적었다는 데까지가 원문에서 확인된다.

교서가 가르칠 사람으로 지목한 이들

교서는 《주례》를 근거로 든다. 외사라는 관직이 책 이름을 사방에 알려 사람들이 글자를 알고 읽을 수 있게 했다는 대목이다. 이를 본떠 서울에서는 한성부 오부가, 지방에서는 감사와 수령이 학식 있는 사람을 널리 구해 두텁게 장려하고 귀천을 가리지 말고 늘 가르치고 익히게 하라고 했다. 부녀는 친속이 정성껏 가르쳐 환히 알게 하라고 따로 적었다. 입으로 외우고 마음으로 생각하게 하면 아들은 효도를, 신하는 충성을 생각하게 되리라는 기대가 이어지고, 예조가 이 뜻을 중외에 알리라는 명으로 교서가 끝난다.

이 배치에서 책을 받는 사람과 뜻을 풀어 주는 사람은 나뉘어 있다. 골목의 부녀는 책을 쉽게 알게 될 사람으로 불리지만, 교서의 지시에서는 친속의 가르침을 받는 자리에 놓인다. 가르치는 사람을 몇 명 두는지, 무엇으로 장려하는지, 언제까지 하는지는 교서에 없다.

책 자체에도 읽는 사람을 돕는 장치가 있었다. 국가유산청이 보물로 소개하는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삼강행실효자도》 설명을 보면 한 사람의 이야기를 한 장에 담아 접었을 때 앞면에 그림을, 뒷면에 전기와 시찬을 두었고, 문장에는 백권점(흰 동그라미 점)을 찍어 끊어 읽기 쉽게 했다. 끊어 읽기 표시는 한문을 어느 정도 읽는 사람에게 쓸모가 있다. 글자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교서의 말대로 곁에서 읽어 줄 사람이 있어야 했다.

마을 고목 아래에서 한 사람이 책을 펼쳐 이웃들에게 보여 주는 모습을 상상해 그린 한지 수채화

그해 11월의 반사와 함길도 북쪽 고을로 간 책

책을 내려 준 기록은 그해 11월 24일 기사에 나온다. 《삼강행실》을 종친과 신하들에게 내려 주고 또 여러 도에 내려 주었다는 한 줄이다. 몇 부를 찍었는지, 도에 간 책이 어느 고을 누구에게 닿았는지는 적혀 있지 않다.

그 뒤 기사에서는 이 책이 북쪽 고을로 보내는 물건 목록에 끼어 있다. 세종 21년(1439) 3월 9일 예조는 함길도 관찰사의 공문에 따라 부거현에 조복과 《육전》 율문, 《농잠서》, 《삼강행실》을 보내자고 아뢰었다. 세종 25년(1443) 2월 15일에는 경원·경흥·회령·온성·종성·부거에 책을 보냈다. 국역 제목은 ‘《삼강행실계주서》’ 한 권처럼 붙어 있지만 원문은 《삼강행실》과 《계주서》 두 책을 나란히 적었다.

책 보따리를 등에 지고 가을 들길을 따라 마을로 걸어가는 사람의 뒷모습을 상상해 그린 한지 수채화

1444년 정창손의 반론과 언문 번역 하교

세종 26년(1444) 2월 20일 기사는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언문 제작을 반대한 상소로 잘 알려져 있다. 이 기사에 《삼강행실》이 다시 나온다. 상소를 읽은 세종이 최만리 등을 불러 꾸짖으면서 응교 정창손이 앞서 한 말을 옮긴다. ‘삼강행실을 반포한 후에 충신·효자·열녀의 무리가 나옴을 볼 수 없는 것은, 사람이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이 사람의 자질 여하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 꼭 언문으로 번역한 후에야 사람이 모두 본받을 것입니까.’

사관은 이 말이 나온 사정을 덧붙였다. 앞서 세종이 정창손에게, 언문으로 《삼강행실》을 번역해 민간에 반포하면 어리석은 남녀가 모두 쉽게 깨달아 충신·효자·열녀가 무리로 나올 것이라고 했고, 정창손이 그 하교에 이렇게 답했다는 것이다. 세종은 이치를 아는 선비의 말이 아니라고 했다. 최만리를 비롯한 일곱 사람이 의금부에 내려졌다가 이튿날 풀려났고, 정창손만 파직되었다. 이 상소가 나온 시점은 훈민정음의 1443년 창제와 1446년 완성 사이다.

1434년 교서는 백성이 문자를 모르니 가르칠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고, 열 해 가까이 지나 세종은 백성이 읽을 수 있는 글자로 책을 옮기는 길을 말했다. 정창손이 충신·효자·열녀가 무리로 나오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한 것은 그의 판단이지 고을마다 조사한 결과가 아니다. 세종의 기대도 하교로만 남았고, 이 기사로는 번역이 그때 이루어졌는지 확인되지 않는다.

성종 대의 강습 절목과 105명을 고른 책

성종 12년(1481) 3월 24일 성종은 사족 부녀 가운데 행실을 잃는 이가 있다며, 언문으로 된 《삼강행실열녀도》를 약간 질 찍어 서울 오부와 여러 도에 내려 주고 마을의 부녀가 다 강습하게 하라고 예조에 명했다. 4월 21일 예조가 올린 절목은 1434년 교서의 ‘친속’보다 한결 자세하다. 서울은 집안이 모여 사니 가장이 각자 가르치고, 지방은 흩어져 살아 친척이 없는 경우도 있으니 명망 있는 촌로를 골라 마을을 두루 다니게 한다. 가장이나 여종이 차례로 전해 깨우치게 하고, 행실이 뛰어난 사람은 정표하며 가르친 사람에게도 상을 준다는 내용이고, 성종은 그대로 따랐다.

성종 20년(1489) 6월 1일 하직 인사를 하던 경기 관찰사 박숭질은 세종 때 반포한 이 책을 두고 ‘관부에도 오히려 이 책이 없는데, 하물며 민간에서이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책이 넓고 길어 어리석은 백성이 두루 보기 어려우니 뛰어난 사례만 골라 간략히 찍어 시골에 나누자는 건의였다. 6월 18일 허침과 정석견은 사람들이 쉽게 알아보고 느낄 만한 이야기를 효자·충신·열녀 각 35명, 모두 105명 골라 올렸다. 이듬해 4월 1일 성종은 《삼강행실》을 서울 오부와 팔도 군현에 내려 주어 어리석은 백성이 두루 알게 하라고 명했다.

지금 전하는 언해본은 105명을 골라 장마다 위쪽 여백에 한글 번역을 단 모양이다. 국립한글박물관 소장 《삼강행실도(언해)》에 대한 국가유산청 설명은 성종 12년에 간행된 것을 초기 언해본으로 추정한다. 1489년 산정 기사에는 번역 이야기가 없어서, 한글을 단 105명본이 언제 처음 나왔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보지 않은 이가 없다’는 문장과 관부에 없던 책

세종이 세상을 떠난 뒤 세종 32년(1450) 2월 22일 의정부는 명나라 예부에 시호를 청하며 세종의 행실을 적어 올렸다. 그 글은 《삼강행실》을 안팎에 반포하니 ‘궁벽한 촌 동리의 아동 부녀에 이르기까지 보고 살피지 않는 이가 없게 하였습니다’라고 쓴다.

39년 뒤 박숭질은 관청에도 이 책이 없다고 했다. 한 문장은 시호를 청하는 외교 문서에, 다른 문장은 지방관의 건의에 들어 있다. 어느 쪽도 어느 마을에서 누가 그림을 보며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는 적지 않는다. 1896년 《독립신문》 창간호가 한글로 지면을 짠 이유를 읽을 때도 편집 방침과 실제 독자 수는 따로 따져야 했다.

1434년 교서가 가르칠 사람으로 지목한 ‘학식 있는 자’가 어느 고을에서 몇 명이나 실제로 뽑혔는지도, 여기까지 읽은 기사들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참고 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41권 세종 10년(1428) 9월 27일 6번째 기사, 42권 10월 3일 1번째 기사, 56권 세종 14년(1432) 6월 9일 2번째 기사, 59권 세종 15년(1433) 2월 24일 2번째 기사, 64권 세종 16년(1434) 4월 27일 2번째 기사, 66권 11월 24일 4번째 기사, 84권 세종 21년(1439) 3월 9일, 99권 세종 25년(1443) 2월 15일, 103권 세종 26년(1444) 2월 20일, 127권 세종 32년(1450) 2월 22일. 《성종실록》 127권 성종 12년(1481) 3월 24일, 128권 4월 21일, 229권 성종 20년(1489) 6월 1일, 6월 18일, 239권 성종 21년(1490) 4월 1일. 인용은 국역을 원문과 대조해 따랐다.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보물 ‘삼강행실효자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 ‘삼강행실도(언해)’(2026년 10월 23일 확인). 이 글의 그림은 현존 책의 판면을 옮긴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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