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1년 4월 29일, 세종은 서울에 없었다. 3월 17일 왕비와 함께 온수현으로 떠난 행차에는 왕세자도 따라나섰다. 그 사이 서울에서 누런 비가 내렸다는 말이 올라왔고, 《세종실록》 92권의 이날 기사는 그것이 재앙의 징조인지를 두고 오간 말을 길게 적었다. 이 다툼 한가운데에 세종의 말 한마디가 끼어 있다. “근년 이래로 세자가 가뭄을 근심하여 … 구리를 부어 그릇을 만들고는 궁중에 두어 빗물이 그릇에 괴인 푼수를 실험하였는데.”
측우기를 소개하는 글에서 ‘1441년 장영실이 발명했다’는 문장을 자주 본다. 실록에서 확인되는 순서는 조금 다르다. 1441년 4월 기사에 나오는 것은 세자가 궁중에 둔 구리 그릇이고, 같은 해 8월 호조가 서운관에 쇠 그릇을 두자고 건의했다. ‘측우기’라는 이름과 1척 5촌·지름 7촌의 규격, 비가 오고 갠 때까지 적는 방식은 1442년 5월 8일 기사에 가서야 나온다. 이 세 기사 어디에도 장영실의 이름은 없다.

누런 비는 재앙이었나
발단은 안평대군의 보고였다. 세종이 누런 비의 변을 들었으니 대가를 맞이하는 여러 가지 일을 모두 그만두라고 하자, 도승지 조서강은 정부와 예조가 자세히 가린 것도 아닌데 갑자기 재이로 볼 수는 없다며 사람을 서울에 보내 참인지 망령된 것인지부터 가리자고 했다. 하연과 정연은 한 걸음 더 나갔다. 요즘 비와 볕이 제때 와서 풍년을 기약할 만하고, 하늘이 정말 누런 비를 내렸다 해도 누런빛은 상서로운 빛이니 괴이하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세종은 전날 환관 김충을 보내 상황을 묻게 했다고 답했다. 그날 저녁 김충이 돌아왔고, 안평대군이 바친 마른 누런 가루 한 봉도 올라왔다. 실록은 짧게 적는다. 모두 송화였다.
세종의 긴 말은 그다음부터다. 즉위한 뒤로 풀씨가 비처럼 내리고, 나뭇잎이 내리고, 곡식 씨앗이 내린 일이 있었다고 꺼낸 뒤, 바람이 나무 위를 지나면 나뭇잎이 날려 비를 따라 내려온다는 옛말을 들었다. 버들개지도 수십 리를 날아 버드나무가 없는 곳까지 가는데, 가볍고 작은 송화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같은 행차 기사에는 수레가 1리를 가면 나무 인형이 스스로 북을 쳤다는 기리고 이야기도 있다. 길을 재는 장치와 비를 재는 그릇이 한 행차 기간의 기록에 나란히 남은 셈이다.
세자가 궁중에 둔 구리 그릇
그릇 이야기는 송화를 가려내는 대목에서 나온다. 세종의 말을 국역 그대로 옮기면 이렇다. “근년 이래로 세자가 가뭄을 근심하여, 비가 올 때마다 젖어 들어 간 푼수를 땅을 파고 보았었다. 그러나 적확하게 비가 온 푼수를 알지 못하였으므로, 구리를 부어 그릇을 만들고는 궁중에 두어 빗물이 그릇에 괴인 푼수를 실험하였는데…”
세자, 곧 훗날의 문종은 처음에 비가 그친 뒤 땅을 파서 빗물이 얼마나 깊이 스며들었는지를 보았다. 그 방법으로는 비가 온 양을 정확히 알 수 없었기에, 빗물을 받아 그릇에 고인 높이를 보는 쪽으로 바꾼 것이다. 땅이 아니라 그릇에 고인 물을 재자는 생각이 이 두 문장에 들어 있다.
세종의 반문은 바로 이 그릇에서 나온다. “이제 이 물건이 만일 하늘에서 내렸다면 하필 이 그릇에 내렸겠는가.” 문맥으로 보면 누런 가루가 세자의 그릇 안에서도 보였던 것으로 읽힌다. 다만 누가 언제 그릇을 들여다보았는지는 기사에 없다. 세종은 이어 가루가 낙숫물이 모여 흐르는 곳에 많고, 모래와 돌이 쓸려 가는 땅이 아니라 끈기 있는 검은 흙에만 있다는 점을 들어, 기와 고랑에 흩어져 있던 송화가 비를 따라 내려온 것이라고 했다. 문답은 “나도 또한 진짜 송화로 여기노라”로 끝난다.
나는 측우기가 언제 생겼는지 알고 싶어 이 기사를 열었다가 기사 제목의 ‘황우의 변’에서 한참 머물렀다. 비의 양을 재려고 만든 그릇이 이 기사에 적힌 까닭은 비의 양 때문이 아니라, 누런 비가 하늘의 경고인지 가리는 자리에 불려 나왔기 때문이다.
같은 해 8월, 호조의 설계
같은 해 8월 18일 호조의 건의는 이 그릇을 나라의 제도로 옮기는 설계로 읽힌다. 호조는 각 도 감사가 비 온 양을 전하여 보고하는 법은 이미 있지만, 흙의 성질이 마르고 젖은 것이 같지 않아 스며든 깊이를 알기 어렵다고 했다. 그래서 서운관에 대를 짓고 쇠로 부어 만든 길이 2척, 지름 8촌의 그릇을 올려 비를 받고, 서운관 관원이 깊이를 재어 보고하게 하자고 청했다.
건의는 그릇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 마전교 서쪽 물속에 얇은 돌을 놓고 받침돌 둘 사이에 네모난 나무 기둥을 세워 척·촌·분을 새긴 뒤, 호조의 낭청이 물 깊이를 살펴 보고하게 했다. 한강변 바위 위에도 푯말을 세우고 척·촌·분을 새겨 도승이 물 깊이를 재게 했다. 지방 고을에는 서울의 쇠 그릇을 본떠 자기나 질그릇을 관청 뜰에 두고, 수령이 깊이를 재어 감사에게 보고하게 했다. 세종은 그대로 따랐다.
실록 누리집의 국역 기사 제목은 ‘호조에서 서운관에 측우기를 설치할 것을 건의하다’이다. 그러나 원문에는 ‘쇠로 그릇을 부어 만든다(以鐵鑄器)’고만 되어 있고 측우기라는 이름은 없다. 4월 기사에서 세자의 그릇은 구리(銅)를 부어 만든 것이었는데, 8월 건의는 쇠(鐵)라고 적었다.
1442년 5월에 붙은 이름
이름이 나오는 것은 이듬해다. 1442년 5월 8일 호조는 비의 양을 재는 일은 일찍이 명을 받았으나 아직 다하지 못한 곳이 있다며 조목을 다시 갖추어 올렸다. 첫 조목에서 서울의 쇠 그릇에 ‘측우기(測雨器)’라는 이름이 붙는다. 길이 1척 5촌, 지름 7촌이고, 자는 주척을 쓴다고 정했다.
무엇을 적을지도 이때 정해졌다. 비가 온 뒤 서운관 관원이 직접 비가 내린 상황을 보고 주척으로 물의 깊이를 재어, 비가 내린 것과 비가 오고 갠 일시, 깊이의 척·촌·분을 자세히 써서 곧바로 아뢰고 장부에 두게 했다. 지방에는 쇠로 부은 측우기와 주척을 한 벌씩 각 도에 보내고, 고을마다 그 체제대로 자기나 질그릇으로 구워 객사 뜰의 대 위에 두게 했다. 주척도 대나무나 나무로 미리 만들어 두라고 했다. 조목은 ‘후일의 참고에 전거로 삼게 하소서’라는 말로 끝난다.
8월 건의와 견주면 달라진 곳이 보인다. 숫자는 길이 2척·지름 8촌에서 주척 1척 5촌·7촌으로 바뀌었다. 8월 건의는 어떤 자로 잰 치수인지 적지 않아서, 실제 크기가 얼마나 달라졌는지는 두 기사만으로 단정할 수 없다. 지방의 그릇을 두는 곳은 관청 뜰에서 객사 뜰로 바뀌었고, 깊이만 재던 보고에 비가 오고 갠 때가 더해졌다. 8월 건의에 있던 마전교와 한강의 눈금은 이 기사에 다시 나오지 않는다. 실록 누리집에서 ‘測雨器’를 원문으로 검색하면 세종 대 기사로는 이 1442년 5월 8일 기사 하나가 나온다.

기사에 없는 이름, 나중의 기억
그릇과 함께 이름이 나오는 사람은 4월 기사의 세자뿐이다. 8월과 이듬해 5월의 건의는 호조가 올렸고, 그릇을 실제로 부어 만든 장인의 이름은 적히지 않았다. 장영실의 이름은 세 기사 어디에도 없다. 이것만으로 장영실이 이 일과 무관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장영실이 발명했다’는 문장을 이 기사들로 뒷받침할 수도 없다.
329년 뒤 영조가 세종 때의 측우기를 다시 불러냈다. 1770년 5월 1일 영조는 세종조의 옛 제도를 본떠 측우기를 만들어 창덕궁과 경희궁에 두고, 팔도와 양도에도 만들어 두라고 명했다. 하교에는 “듣건대, 《세종실록》에 측우기는 석대를 만들어 안치하였다고 하였다”는 말이 들어 있다. 내가 읽은 1441년과 1442년의 호조 기사에는 측우기를 올려 둘 대(臺)를 만든다는 말만 있고, 그 대를 돌로 만든다는 말은 없다. 영조가 들은 대목이 다른 기사였는지는 이번에 찾지 못했다. 영조는 석대의 높이를 포백척으로 1척, 넓이를 8촌, 위에 파는 둥근 구멍의 깊이를 1촌으로 정하고, 1740년에 새로 만든 자를 쓰게 했다.
이 글은 실록 기사만 읽었다. 세종 대의 다른 기록이나 오늘 남아 있는 측우기 유물과는 대조하지 않았다. 4월 기사의 구리 그릇이 얼마나 컸는지, 그 뒤 어떻게 되었는지도 기사에는 나오지 않는다.
세종 대의 일을 처음 만든 때와 제도로 굳힌 때로 나눠 읽는 일은 훈민정음을 만든 해와 책으로 완성한 해를 나눠 본 글에서도 했다. 실록이 적은 제도의 조건을 한 줄씩 따져 본 신문고 글도 같은 방식으로 읽었다.
1442년 호조는 비가 오고 갠 일시와 깊이의 분수를 적어 후일의 참고로 삼자고 했다. 꼭 백 년 뒤인 중종 37년 5월 29일, 실록에는 이런 한 줄이 남았다. “28일부터 이날까지 비가 내리기도 하고 개기도 하였는데, 측우기의 물을 잰 것은 5분이었다.”
참고 자료
《세종실록》 92권, 세종 23년(1441) 4월 29일 1번째 기사, 황우의 변과 세자의 구리 그릇
《세종실록》 92권, 세종 23년(1441) 3월 17일 1번째 기사, 온수현 행행
《세종실록》 93권, 세종 23년(1441) 8월 18일 4번째 기사, 호조의 건의
《세종실록》 96권, 세종 24년(1442) 5월 8일 1번째 기사, 측우기 조목
《중종실록》 98권, 중종 37년(1542) 5월 29일 2번째 기사
《영조실록》 114권, 영조 46년(1770) 5월 1일 2번째 기사, 측우기 제작 명령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누리집 원문 검색 ‘測雨器’ (2026년 10월 15일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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