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호 ‘대한’은 언제 정해졌을까 — 1897년 즉위 전날의 실록

“지금 국호를 ‘대한’이라고 정한다고 해서 안 될 것이 없다.” 1897년 10월 11일, 고종이 의정 심순택과 특진관 조병세, 궁내부 대신 민영규, 장례원 경 김영수를 불러 앉힌 자리에서 한 말이다. 《고종실록》 36권의 이날 기사는 짧은 문답 끝에 지시 하나를 붙인다. 원구단에서 지낼 고유제의 제문과 반조문에 모두 ‘대한’으로 쓰라는 것이었다.

실록이 적은 날짜로 보면 고종은 황제 즉위식 하루 전에 국호를 정하고, 즉위 이튿날인 13일 조서로 반포했다. 연호 ‘광무’는 두 달 전에, 황제 칭호를 받아들이겠다는 답과 즉위 날짜는 10월 3일에 이미 나와 있었다. 실록에 드러난 준비 순서를 따라가 보면 국호는 거의 끝자리에 있다. 다만 이 순서는 대한제국이 사라진 뒤 편찬된 《고종실록》이 남긴 것이다.

연호와 제단 터가 먼저였다

먼저 정해진 것은 연호다. 8월 14일 심순택이 신하들이 의논한 연호 후보로 ‘광무’와 ‘경덕’을 올리자, 고종은 ‘광무’ 두 글자를 쓰라고 답했다. 이틀 뒤인 8월 16일 즉조당에서 연호를 세운 것을 축하하는 의식이 열렸다. 이날 반포한 조서는 “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로 시작한다. 이 조서 속의 고종은 아직 왕이다.

10월 1일, 장례원 경 김규홍은 영선사장 이근명, 상지관 오성근과 함께 원구단 자리를 둘러보고 와서 남서 회현방 소공동계의 땅이 길하다고 아뢰었다. 단을 쌓기 시작하는 날과 위판을 만드는 날은 음력 9월 7일로 잡혔고, 위판을 만들 곳으로는 근정전이 정해졌다. 같은 날 심순택과 조병세는 백관을 거느리고 정청하여 황제 칭호를 올리겠다고 청했다. 《만국공법》을 끌어와, 자주권을 가진 나라는 스스로 존호를 세울 수 있다고도 했다. 고종의 비답은 이번에도 거절이었다.

고종이 뜻을 바꾼 것은 10월 3일이다. 정청이 다시 올라오자 그는 먼저 아직 허락하지 않는 데에는 헤아림이 있다고 답했다. 재차 아뢴 뒤에 내린 비답에서야 “마지못해 애써 따르겠다”는 말이 나온다. 같은 날 대신들을 만난 자리에서는 따르긴 했으나 마음이 부끄럽다고 덧붙였다. 즉위 날을 묻는 장례원 경 김영수에게는 이달 안으로 잡으라고 했고, 김영수는 곧 음력 9월 17일을 올려 윤허를 받았다. 날짜만 놓고 보면 제단 터를 고른 일이 칭호 수락보다 이틀 빠르다.

원구단 터를 살피는 관리들의 뒷모습을 상상해 그린 한지 수채화

열흘 동안 바뀐 현판과 위판

10월 1일부터 10일까지 실록의 날짜별 기사 목록을 하루씩 넘겨 보았다. 원구단 터, 칭호를 청하는 정청, 즉위 날짜, 왕태후 위호, 천지에 고하는 의절 같은 제목이 이어진다. 국호를 다룬 제목은 이 열흘 사이에 없다. 제목 목록을 본 것이어서, 다른 기사 본문 속에 국호 이야기가 섞여 있었는지까지 장담할 수는 없다.

그 사이 다른 이름들은 차례로 바뀌었다. 10월 7일 고종은 즉조당의 편액을 ‘태극전’으로 새겨 걸라고 명했다. 10월 8일에는 사직단의 위판을 태사·태직으로 고쳐 쓰기로 하고 날을 음력 9월 14일로 잡았다. 10월 9일에는 황후를 책봉한 뒤 빈전의 명정을 음력 9월 18일 신시에 고치기로 했다. 명정은 장례 때 죽은 이의 신분을 적어 세우는 긴 기다. 궁궐 건물의 현판, 제단의 위판, 빈전의 명정이 새 칭호에 맞춰 바뀔 날을 받는 동안 나라 이름은 아직 실록 제목에 오르지 않았다.

즉위 하루 전의 문답

10월 11일의 첫 기사에서 고종은 진전과 빈전에 나아가 예를 올리고, 원구단으로 가서 희생과 제기를 살핀 뒤 그곳에서 밤을 지냈다. 국호를 의논한 인견은 같은 날 세 번째 기사다. 기사 순서가 하루 일과의 시간 순서와 꼭 같지는 않아서, 문답이 원구단으로 떠나기 전이었는지는 기록만으로 알 수 없다.

문답은 고종이 먼저 열었다. 모든 예가 새로워졌으니 원구단에 처음 제사를 올리는 지금부터 국호를 정해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심순택은 ‘조선’이 기자가 봉해졌을 때의 이름이라 애당초 합당하지 않았다고 했고, 조병세는 천명이 새로워졌으니 국호도 새로 정해야 한다고 했다. 고종이 든 근거는 둘이다. 이 나라가 삼한의 땅이며 나라를 세울 때 하나로 통합되었다는 것, 그리고 각국의 문서가 이 나라를 조선이라 하지 않고 한(韓)이라 불러 왔다는 것이다.

조병세의 맞장구는 한 걸음 더 나간다. 그는 ‘한(韓)’ 자의 변이 ‘조(朝)’ 자의 변과 기이하게 들어맞으니 우연이 아니라고 아뢰었다. 두 글자의 왼쪽이 같은 모양이라는 데서 길조를 읽은 것이다. 고종은 이 말에 따로 대꾸하지 않고 문답을 닫는다. “국호가 이미 정해졌으니, 원구단에 행할 고유제의 제문과 반조문에 모두 ‘대한’으로 쓰도록 하라.”

내가 이 기사에서 오래 들여다본 곳은 마지막 지시다. 국호는 이튿날 원구단에서 읽을 제문과 즉위를 알릴 반조문을 앞에 두고 정해졌다. 같은 문답에서 고종은 세상에 공표하지 않아도 세상이 모두 ‘대한’이라는 칭호를 알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기사의 끝은 그 이름을 어느 문서에 먼저 적을지를 정하는 말이다.

등불 켜진 전각 마루에 놓인 붓과 빈 종이를 상상해 그린 한지 수채화

빈전에 고한 황후 책봉

10월 12일, 천지에 고하는 제사가 끝나자 심순택이 백관을 거느리고 황제 자리에 오르기를 청했다. 이날 기사에 따르면 고종은 신하들의 부축을 받으며 단에 올라 금으로 장식한 의자에 앉았다. 심순택이 열두 가지 무늬를 놓은 곤면을 입혀 드리고 옥새를 올렸다. 기사는 그가 두세 번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황제 자리에 올랐다고 적는다. 왕후 민씨를 황후로, 왕태자를 황태자로 책봉했다는 문장이 바로 이어진다.

황후로 책봉된 왕후 민씨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같은 날 고종은 빈전에 나아가 황후 책봉을 고하는 별전을 지냈고, 규장각 학사 이재순은 대행 황후의 명정을 고쳐 쓰는 서사관에 임명되었다. 빈전은 장례를 치르기 전까지 왕이나 왕비의 관을 모셔 두는 전각이다. 실록은 40일 뒤인 11월 21일에야 대행 황후의 영가가 산릉으로 떠났다고 적는다. 즉위식 날의 책봉은 아직 장례를 마치지 않은 왕후에게 새 칭호를 올리는 일이기도 했다.

흰 휘장이 드리운 가을 궁궐 전각을 상상해 그린 한지 수채화

반조문이 처음 적은 ‘대한’

13일 반포된 반조문의 첫머리는 “봉천 승운 황제는 다음과 같이 조령을 내린다”이다. 8월의 연호 조서가 “왕은”으로 시작한 것과 견주면 두 달 사이에 문서의 주어가 바뀌었다. 조서는 단군과 기자 이후 강토가 갈라져 서로 다투다가 고려 때에 이르러 마한·진한·변한을 통합했다고 말하고, 태조가 북쪽으로 말갈의 지경까지, 남쪽으로 탐라까지 아울렀다고 이어 간다. 이틀 전 문답에서 고종이 꺼낸 ‘삼한’이 여기서는 긴 역사 서술이 되었다. 끝에는 홍문관 태학사 김영수가 지었다는 주가 달려 있다.

날짜는 달력을 가려 읽어야 한다. 반조문은 즉위한 날을 ‘올해 9월 17일’이라고 적지만, 실록의 기사 날짜로는 10월 12일이다. 10월 1일 기사 첫머리에 ‘음력 정유년 9월 6일’이라는 주가 달려 있으니, 열하루 뒤인 10월 12일은 음력 9월 17일이다. 반조문은 음력으로, 실록의 날짜는 양력으로 적힌 셈이다. 8월 조서가 연호를 세운 날로 적은 ‘8월 16일’은 실록의 기사 날짜와 같다.

같은 날 실록은 축하하러 온 각국 공사와 영사들을 만났다고 적고 명단을 길게 붙였다. 일본 판리공사 가토 마스오, 미국 판리공사 알렌, 러시아 공사 스페예르, 프랑스 판사대신 콜랭 드 플랑시, 영국 총영사 조르단, 독일 영사 크린 등이다. 이들의 정부가 새 국호와 황제 칭호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이 기사에 나오지 않는다.

이 순서를 읽을 때의 조건

이 글의 날짜와 발언은 모두 《고종실록》에서 가져왔다. 조선왕조실록 누리집의 소개는 고종·순종실록이 1927년부터 1932년까지 조선총독부 주도로 조선사편수회가 편찬한 책이며, 국권 침탈과 황실 동정에 관한 기록에 왜곡이 많아 참고하거나 인용할 때 주의가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여기서는 실록에 적힌 날짜와 발언의 순서를 옮기는 데서 멈추고, 문답의 속뜻을 짐작해 보태지 않았다. 같은 날들을 적은 《승정원일기》나 당시 신문과의 대조는 아직 하지 못했다. 국호가 언제 처음 거론되었는지, 이보다 앞선 기록이 있는지도 그 대조로 확인할 일이다.

무언가를 만든 날과 세상에 알린 날을 나눠 읽는 일은 훈민정음을 만든 해와 책으로 완성한 해를 나눠 본 글에서도 했다. 그보다 한 해 앞서 서울에서 나온 한글 신문이 지면에 무엇을 내걸었는지는 《독립신문》 창간호를 읽은 글에 적어 두었다.

10월 13일의 첫 기사는 이렇게 적혀 있다. 빈전에 나아가 조전과 별전을 행하고, 이어 태극전에 나아가 백관의 하례를 받았으며, 조서를 반포했다. 새 국호를 세상에 알린 날, 실록이 적은 순서로 고종이 먼저 들른 곳은 엿새 전 새 이름을 받은 태극전이 아니라 아직 장례를 치르지 못한 황후의 빈전이었다.

참고 자료
《고종실록》 36권, 고종 34년(1897) 10월 11일 3번째 기사, 국호를 ‘대한’으로 정한 인견
《고종실록》 36권, 1897년 10월 12일 1번째 기사, 황제 즉위와 황후·황태자 책봉
《고종실록》 36권, 1897년 10월 13일 2번째 기사, 국호와 황제 칭호를 알린 반조문
《고종실록》 36권, 1897년 10월 3일 1번째 기사, 황제 칭호 수락 · 같은 날 4번째 기사, 즉위 길일
《고종실록》 36권, 1897년 10월 1일 1번째 기사, 원구단 터 간심
《고종실록》 35권, 1897년 8월 14일 1번째 기사, 연호 ‘광무’ · 36권, 8월 16일 2번째 기사, 연호 조서
《고종실록》 36권, 1897년 11월 21일 2번째 기사, 대행 황후 영가의 발인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누리집, 「조선왕조실록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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