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군이 거듭 들이닥치던 때, 고려는 왜 수만 장의 나무판에 불경을 다시 새기기 시작했을까요? “부처의 힘으로 적을 물리치려 했다”는 한 문장만으로는 1237년 기도문에 담긴 기억과 국가 사업의 규모가 충분히 보이지 않습니다.
이규보가 지은 「대장각판군신기고문」을 사건 순서로 읽으면 이유가 세 겹으로 나뉩니다. 불타 없어진 초조대장경을 되살리는 일, 거란 침입 때의 판각을 다시 불러내는 일, 전쟁 속에서 왕과 신하의 공동 발원을 조직하는 일이 한 사업 안에서 만났습니다.
먼저 사라진 것은 ‘첫 번째 대장경’이었다
지금 해인사에 남아 있는 경판은 고려가 처음 만든 대장경이 아닙니다. 현종 때 판각을 시작한 초조대장경이 먼저 있었고, 그 경판은 대구 부인사에 보관되다가 1232년 몽골 침입 과정에서 불탔습니다. 오늘의 팔만대장경을 ‘재조대장경’이라 부르는 까닭도 이미 있던 대장경을 다시 새겼기 때문입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번역한 《동국이상국집》 전집 권25 「대장각판군신기고문」은 이 소실을 단순한 물건의 손실로 적지 않습니다. 여러 해에 걸친 공적이 하루아침에 재가 되었고, 나라의 큰 보배를 잃었다고 전합니다. 새 경판 조성에는 전쟁을 막아 달라는 바람뿐 아니라, 사라진 국가적 기록을 복구한다는 의미도 들어 있었습니다.

1237년, 과거의 승리를 현재의 논리로 불러냈다
기도문은 1011년의 일을 길게 되짚습니다. 거란군이 송악에 머물러 물러나지 않자 현종과 신하들이 대장경을 새기겠다고 서원했고, 뒤이어 거란군이 물러났다는 이야기입니다. 글은 “대장경도 같고, 임금과 신하가 함께 발원하는 것도 같다”는 논리로 몽골 침입기의 판각을 앞선 사례와 연결합니다.
여기서 조심할 점이 있습니다. 이 기록은 고려 조정이 두 사건을 그렇게 연결해 설명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경판을 새긴 행위가 실제로 군대의 철수를 일으켰다고 역사적으로 입증하는 자료는 아닙니다. 기록 속 인과관계와 오늘날 확인할 수 있는 인과관계를 나눠 읽어야 합니다.
발원은 종교였지만 실행은 조직이었다
기도문의 화자는 국왕과 태자, 여러 관료가 함께 목욕재계하고 불보살과 호법신에게 아뢴다고 적습니다. 전쟁이 그치고 나라 안팎이 편안해지며 국운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내용도 분명합니다. 당시 사람들이 불력에 기대어 전쟁의 종식을 기원했다는 점은 사료 자체에서 확인됩니다.
동시에 글에는 “이미 담당 관사를 두어 일을 시작하게 했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발원이 먼저이고 행정이 뒤따랐다는 단순한 장면보다, 종교적 명분과 관청의 실무가 함께 움직이는 모습에 가깝습니다. 왕과 문무 관료가 이름을 올리고, 대장도감 같은 조직이 긴 작업을 맡았습니다. 팔만대장경을 신앙의 산물로만 보아도, 인쇄 기술의 성취로만 보아도 절반이 빠지는 이유입니다.

‘16년’과 ‘12년’은 왜 함께 보일까
보통 재조대장경은 1236년부터 1251년까지 16년에 걸쳐 완성됐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대장도감 설치와 준비, 판각 뒤의 마무리와 완성 의식까지 포괄한 기간입니다. 한편 현존 경판의 간행 기록을 분석한 설명에서는 실제 주요 판각을 1237년부터 1248년까지 12년으로 봅니다. 두 숫자는 서로를 곧바로 부정하지 않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은 1248년에 대장목록을 마지막으로 새긴 사실과 1251년 고종이 대장경판당에 행차한 기록을 구분합니다. 준비부터 의식까지 센 기간과 경판의 간기로 확인한 판각 기간의 범위가 다른 것입니다. 정확한 숫자를 말하려면 무엇을 시작과 끝으로 삼았는지도 함께 밝혀야 합니다.
완성 뒤에 남은 것은 승전 기록만이 아니다
재조대장경 조성 기간에도 몽골과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팔만대장경을 새긴 뒤 곧 전쟁에서 이겼다는 식으로 요약하면 실제 시간의 흐름을 놓칩니다. 기도문이 보여 주는 것은 결과를 보증한 주문이 아니라, 전쟁과 소실 앞에서 고려 조정이 선택한 대응의 언어입니다.
그 선택은 옛 기록을 복구하고, 여러 판본을 대조해 내용을 교정하며, 반복 인쇄할 수 있는 판목을 만드는 장기 사업으로 이어졌습니다. 완성된 경판이 훗날 해인사로 옮겨져 전해졌다는 사실은 1230년대의 발원과 별개의 보존 역사도 있음을 알려 줍니다. 기록 속 명분과 실제 결과를 나눠 읽은 다른 사례는 계유정난과 《단종실록》 글에서 볼 수 있습니다. 관련 글은 고대와 고려에서 이어가며, 기준은 사료 기준에 정리해 두었습니다.
1011년부터 1251년까지 나란히 놓기
| 시점 | 기록에서 확인할 일 | 읽을 때 구분할 점 |
|---|---|---|
| 1011년 | 거란 침입기에 초조대장경 판각을 서원 | 1237년 기도문이 불러낸 선례 |
| 1232년 | 부인사 초조대장경 경판 소실 | 재조 사업의 상실 배경 |
| 1236~1237년 | 담당 관사 설치와 기고문 작성 | 발원과 국가 조직이 함께 등장 |
| 1248년 | 간행 기록상 대장목록 판각 | 주요 판각 작업의 마무리 |
| 1251년 | 고종의 대장경판당 행차 | 조성 사업 완성을 기념한 시점 |
기도와 행정을 따로 떼지 않기
나는 팔만대장경을 오래 보존된 목판이라는 결과로 먼저 기억했습니다. 이번에는 완성품보다 시작을 알린 문장을 따라가 보았습니다. 그 안에는 불탄 경판에 대한 상실감, 한 세기 전의 선례, 전쟁이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 이미 움직이기 시작한 관청이 동시에 있었습니다. 믿음과 행정을 따로 떼기보다 둘이 어떻게 한 사업을 떠받쳤는지 보는 편이 이 기록에 더 가까웠습니다.
이번 글에서 확인한 문헌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동국이상국집》 전집 권25 「대장각판군신기고문」 원문·번역 및 해설 (확인일 2026-09-23)
-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동국이상국집》 전집 권25 「대장각판군신기고문」 (확인일 2026-09-23)
- 국가유산포털, 고려대장경판과 제경판 (확인일 2026-09-23)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확인일 2026-09-23)
대장경 기록에 관한 질문
연도나 사료 문구가 본문과 다르게 읽히는 대목을 찾으셨다면 아래에 해당 문장을 적어 주세요. 《동국이상국집》 번역과 경판 간행 기록을 다시 맞춰 본 뒤, 확인한 근거를 답글로 남기겠습니다. 개인 연락처는 적지 마십시오.
답글 남기기